에르미타주에서 피카소와 독일 회화를 만나다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이탈리아관을 지나 우리에게는 익숙하기도 한 피카소가 있는 스페인 작품과 반면 다소 낯선 독일 미술을 만날 수 있다.

스페인 회화관 — 붉은 벽이 품은 어둠

신 에르미타지(New Hermitage) 2층, 스페인 회화관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을 때 먼저 도달한 것은 색깔이었다.


붉은 벽. 짙고 깊은 크림슨 레드가 천장까지 이어지고, 그 위로 채광창에서 자연광이 조용히 쏟아지고 있었다. 조명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햇빛 특유의 완만한 산란. 그 빛 속에서 바로크 회화의 명암은 제대로 살아났다.

Diego Velázquez, <Luncheon Three Men at Table>, 1617

시녀들로 우리에 잘 알려진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의 「세 남자의 식사(Luncheon Three Men at Table, 1617)」 앞에 섰다. 22살의 벨라스케스가 세비야에서 그린 초기작이다. 카라바조의 영향이 뚜렷한강렬한 명암 대비로, 평범한 식탁 장면이 묘하게 극적으로 변한다.


세 남자의 얼굴에는 아직 종교도, 신화도 없다. 그저 빵을 먹고 있는 사람들. 그런데 그 평범함이 오히려 오래 눈을 잡아두었다. 대가는 결국 평범한 것을 특별하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걸, 이 그림은 조용히 증명하고 있었다.


붉은 벽을 따라 이탈리아 회화들과 나란히 걸린 스페인 작품들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같은 가톨릭 문화권이지만, 이탈리아가 색채와 관능으로 신을 찬양했다면, 스페인은 어둠으로 신을 드러냈다.


무리요(Murillo)의 성모는 구름 위에서도 슬픔을 띠고 있고, 엘 그레코(El Greco)의 인물들은 불가사의하게 길게 늘어나 있다. 붉은 벽과 자연광은 그 온도차를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당시에는 엘 그레코의 작품을 무심히 지나서 작품을 깊이 보지 않아 사진을 남기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 이후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작년말 세종문화회관 전시에서 엘 그레코의 작품을 만날 수 있어서 반가웠다.

El Greco, <The penitent Saint Peter>, 1541~1641
두 구역 사이 — 안토니오 치제리의 「그리스도의 매장」

스페인 회화관에서 독일 낭만주의 전시실로 넘어가는 동선 어딘가, 소전시실 하나가 끼어 있었다.

안토니오 치제리(Antonio Ciseri, 1821-1891)의 「그리스도의 매장(The Entombment)」.

치제리는 피렌체 아카데미에서 오랫동안 수학한 화가로 이탈리아 아카데미즘에 속해 있어서 이 그림은 스페인 바로크의 잔향을 품으면서도, 19세기 낭만주의 특유의 정서적 절제를 함께 지닌다. 두 세계의 경계에 걸쳐 있는 작품이었다.


화면 속 그리스도의 죽음을 둘러싼 인물들의 슬픔은 격렬하지 않다. 오히려 지쳐 있다. 울고 난 뒤의 공허함, 넋이 나간 얼굴들. 종교적 비통함이 인간적 탈진으로 전환되는 그 경계를 치제리는 정확하게 포착했다.


바로크가 슬픔을 '연출'했다면, 치제리는 슬픔이 '소진된 이후'를 그렸다.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독일 낭만주의의 방으로.


독일 회화 — 고요함과 욕망 사이

에르미타지에서 가장 조용한 방이었다.

근대 회화 갤러리 옆, 독일 회화를 따로 모아둔 소전시실. 관람객 발길도 드물었다. 스페인 바로크의 극적인 명암이나 이탈리아의 풍부한 색채와는 완전히 다른 공기.


안으로 들어서자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가 기다리고 있었다. 독일회화를 잘 모르시는 분들도 언덕위에 서 있는 남자의 작품은 한번 보신적이 있을 것이다.


「리젠게비르게(Riesengebirge, 1830-35 추정)」와 「산 속의 아침(Morning in the Mountains)」, 그리고 「달빛 아래 바다(Moonrise over the Sea)」. 세 작품이 나란히, 혹은 마주 보며 걸려 있었다.

Caspar David Friedrich, <Riesengebirge>, 1925

프리드리히의 그림 앞에서 사람들은 흔히 말을 잃는다. 그것은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그림이 무언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시선이 아니라 침묵을.


「달빛 아래 바다」에서 두 인물은 등을 돌린 채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다. 관람자인 우리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를 초대하면서 동시에 멀리하게한다.


그 수수께끼 같은 구성이 프리드리히의 트레이드마크 등 돌린 인물이다. 화면 속 인물과 같은 시선으로 자연을 바라보게 만드는 장치. 그렇게 우리는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

Caspar David Friedrich, <Moonrise over the Sea>

「산 속의 아침」에서 안개는 산의 윤곽을 지운다. 무엇이 거기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무언가가 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자연의 광대함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과 경외가 이 안개 속에 살고 있다.

Caspar David Friedrich, <Morning in the Mountains>

프리드리히의 그림들 사이에 있으면, 어딘가 고요해진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9월 날씨가 이미 서늘했고, 그 방의 온도는 더 낮은 것 같았다. 혹은 그냥 그렇게 느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같은 방에서, 전혀 다른 독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루트비히 크나우스(Ludwig Knaus)의 「들판의 소녀(Girl in a Field, 1857)」는 여전히 낭만주의의 온기를 품고 있었다.


여름 들판에 혼자 앉아 있는 소녀의 정경—소박하고, 서정적ㅡ, 독일 특유의 일상적 아름다움. 프리드리히의 숭고함이 가시고 나면 이 그림에서 잠깐 숨을 고를 수 있었다.

Ludwig Knaus < Girl in a Field > 1857


그러나 프란츠 폰 슈투크(Franz von Stuck)의 「여인을 위한 싸움(Fighting for a Woman, 1905)」


앞에 서자 그 온기는 순식간에 날아갔다. 두 남자가 여인을 두고 맨몸으로 격투를 벌이는 장면. 근육의 긴장, 뒤틀린 몸, 원시적 욕망.

Franz von Stuck,< Fighting for a Woman >>, 1905

클림트가 빈분리파의 창시자인것 처럼 슈투크는 뮌헨 분리파의 창립자로, 신화적 주제를 통해 인간 본능의 어두운 층위를 즐겨 파헤쳤다.


프리드리히가 자연 앞에서 인간의 왜소함과 경건함을 불러냈다면, 슈투크는 인간 내부의 짐승을 끄집어냈다.

이 작품의 강렬함을 만난이후 슈튜크의 작품을 좋아하게되었다.

몇 작품을 소개하면,

Franz_von_Stuck <Palermo>,1909

프란츠 폰 슈투크는 이 작품에서 단순한 인물의 아름다움을 그리지 않는다. 그는 욕망이 태어나는 순간, 그리고 그것이 ‘죄’로 인식되는 경계를 포착한다. <죄> 앞에 서면, 우리는 한 여인을 마주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본능을 마주하게 된다.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창백한 몸은 순수처럼 보이지만, 어깨 위에 감긴 뱀은 그 순수를 조용히 무너뜨린다. 여인의 시선은 노골적이지 않다. 오히려 담담하고 고요하다. 그러나 그 고요함 속에서 우리는 설명하기 어려운 끌림을 느낀다.


Franz_von_Stuck ,<Sternschnuppen_별똥별들>,1909

슈투크의 작품과 다른 느낌의 <별똥별>이다. 끝없이 펼쳐진 밤하늘 아래, 들판에 나란히 앉은 두 인물을 통해 고요한 사색과 우주에 대한 경외감을 표현한 작품이다.


남청색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점묘에 가깝게 묘사되어 있고, 두 줄기의 유성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지나가면서 장면 전체에 신비롭고 초월적인 분위기를 부여한다.


여자는 하늘의 별똥별을 바라보고 남자는 그 여자를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별을 바라보는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고독함과 연대감”을 시적으로 시각화한 낭만주의적 작품이다.


피카소가 있던 방

에르미타지 근대 미술 컬렉션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특히 피카소.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청색 시대와 입체파로의 전환기를 거의 완벽하게 볼 수 있다. 「두 자매(Two Sisters, 1902)」—방문(The Visit)이라고도 불리는—는 청색 시대의 전형이다.


수녀와 창녀, 혹은 어머니와 딸이라고도 해석되는 두 여인이 서로 기대고 있다. 차갑고 우울한 파란색 속에서 그들의 연대는 더 절실해 보인다.

Pablo Picasso Two Sisters <The Visit>, 1902


「압생트(Absinthe, 1901)」에서 술을 앞에 두고 혼자 앉은 여인. 뭘 기다리는지, 뭘 잃었는지, 알 수 없다.

압생트는 19세기 파리 보헤미안들의 음료이자 망각의 수단이었다. 파리의 인상파 화가들이 주로 다루었던 소재이기도 하다. 피카소는 그 여인의 모습에 자신이 목격한 파리 빈민가의 모든 고독을 압축해 넣었다.

그리고 1907년—모든 것이 달라지는 해.

「여인의 흉상(Bust of a Woman, 1907)」, 「베일의 춤(Dance with Veils, 1907)」 이 작품들에서 얼굴은 부서지고, 몸은 분해되고, 원근법은 해체된다.

Pablo Picasso <Bust of a Woman>, 1907
Pablo Picasso, <Dance with Veils>, 1907

같은 해 피카소는 파리의 아틀리에에서 「아비뇽의 처녀들」을 완성하고 있었다. 근대 회화의 문법이 뒤집어지는 순간, 그 파편들이 에르미타지의 방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에르미타지는 너무 크고, 너무 많고, 하루에 다 소화될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다. 스페인 바로크의 붉은 방에서 독일 낭만주의의 조용한 전시실까지, 그 거리는 물리적 거리이기도 하고 시간과 감정의 거리이기도 하다. 벨라스케스의 식탁에서 프리드리히의 안개까지. 피카소가 해체한 얼굴에서 치제리가 기록한 슬픔까지.


그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인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떤 그림은 극적인 빛과 어둠으로, 어떤 그림은 안개로, 어떤 그림은 파란색으로, 어떤 그림은 부서진 형태로.


다음은 우리들에게 잘알려진 프랑스 회화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