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쇼핑 심리학 에세이 (25)
올해도 '어김없이' 한 해가 저물어가는 모습이 곳곳에서 목격된다.
서점 문구코너에는 컬러풀하면서도 다양한 디자인의 다이어리가 매대에 진열되어 있고, 커피숍에는 아기자기하게 장식된 크리스마스트리가 빨간 커피잔과 텀블러를 배경으로 다소곳이 서있다.
술기운에 얼굴이 벌게진 서너 명의 직장인이 식당에서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지나는 이에게조차 세상의 무게를 느끼게 만든다. (북적이는 느낌은 그 어디에도 없는 연말이지만)
그러고 보면 한 해가 저물어가는 모습이라는 것도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다가올 시간에 대한 기대감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어느 겨울날의 풍경화에 다름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유독 12월이 되면 그 가치가 더욱 크게 느껴지게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다시는 오지 않을 시간의 개념이 12월이 되고 해가 바뀌는 지점으로 갈수록 구체화되기 때문으로 풀이해볼 수 있을 것 같다. 1월 1일 밤 11시와 12월 31일 밤 11시는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그 느낌은 완전히 다르니까 말이다.
사람들은 보통 겨울이 오고 12월을 맞이하면서 시간의 희소성을 '비로소' 인지하게 되고, 지나간 시간에 대한 상실의 슬픔을 다가올 시간에 대한 희망으로 '그제야' 희석시키려 한다.
연말 분위기가 늘 쓰면서도 단 소주와 닮아있다는 느낌이 드는 까닭은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사실 상실에 대한 고통은 인간이 가진 본능 중 가장 기본적인 것 중 하나이므로 마케팅 분야에서도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우리가 가장 흔히 마주하는 온오프라인의 'SALE'을 그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할인 혜택을 못 받게 되니까 많은 사람들이 SALE 기간에 구매를 하려 하고 그것이 합리적인 소비라는 만족감을 갖게 만든다.
하지만 백화점 등의 대규모 세일 행사가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준다는 의외의 조사 결과도 있다.
"원하는 물건을 손에 넣지 못할까봐 불안하다"는 측면이 있다는 것인데, 좋은 물건을 '나만'저렴한 가격에 사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은 사람들을 신경질적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FOMO(Fear Of Missing Out :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 심리는 SALE뿐이 아닌, 여러 가지 타임마케팅 형태로 자주 접할 수 있다.
특정한 날짜를 기념일화해서 당일 프로모션을 지급하는 이벤트라든가, 특정 요일이나 시간대에 접속하면 할인을 해주는 이벤트 등이 그런 것들이다.
홈쇼핑 또한 타임마케팅의 대표주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대부분의 방송이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홈쇼핑에는 프로그램의 종료 타임이 떠있곤 하는데, 고객들은 그 타임이 0:00으로 변해갈수록 종료 전 구매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심리가 강하게 발동된다고 한다.
실제로 방송을 진행해보면 거의 대부분 종료 직전의 주문 콜이 가장 높이 올라간다. 살까 말까 망설이다가 종료 시점이 임박하면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최고조에 달하게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쇼핑객들이 쇼핑 도중 느끼는 가장 우세한 감정이 '흥분(excitement)'이라는 실험 결과가 있었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둘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고 보인다. 즉 시간이 종료되어 사지 못하면 손해를 볼 것 같은 감정이 조바심을 유발하고, 그 조바심이 흥분의 감정을 불러와 주문을 하지 않고는 못 견디게 만드는 일련의 흐름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실 이는 홈쇼핑에서 가장 흔히 사용되는 판매기법이지만, 불필요한 충동구매를 유발할 가능성이 높기에 수년 전부터 자체 규범을 만들어서 준수하고 있다. 예를 들어 '실제 매진이 아닌데 매진될 것 같다는 뉘앙스로 말해서는 안된다' 같은 심의 준수 사항이 있음을 밝힌다.)
마케터들에게도 시간의 힘은 이래저래 위대하다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느끼기 위해 SALE 종료 시간을 놓치지 않는 것은 중요할 수 있다. 그러나 냉정히 말해 홈쇼핑 종료 타임이 줄어들면서 사라지는 것은 SALE 조건 이전에 우리에게 주어진 그날의 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내 인생의 가장 젊은 날이 오늘이라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사실 우리가 정말 놓치지 말아야 할 기회는 바로 '오늘, 지금'이 아닐까. 놓치지 말아야 할 좋은 기회는 '오늘'이라는 이름으로 매일 찾아오지만, 나의 오늘은 늘 '내 인생의 마지막'이라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 딱 한 번만 보여드리는 조건'은 어쩌면 오늘이라는 것, 그것 하나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모두가 힘들었던 한 해가 저물어가는 모습이, 저마다 소중한 오늘의 모습으로 화(化)하여 마침내 목격되고 마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아듀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