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쇼핑 심리학 에세이 (27)
"아빠, 아빠는 어떤 숫자가 제일 좋아? 난 7이 제일 좋아. 러키세븐이래."
숫자를 배우고 그 숫자를 다시 영어로 어떻게 읽는지 배울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행운을 가져다주는 숫자가 7이라는 얘기를 어디선가 듣고 난 다음부터 7은 어린 내게 주술적인 숫자가 되었다. 그래서 분명 다른 사람들도 모두 7을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아버지께 확인차 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답변은 예상과는 다른 것이었다. 세상일이 늘 그렇듯 예측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아빠? 아빠는 숫자 9를 좋아하지."
"응? 왜?"
"숫자 중에 제일 센게 9거든!"
1등을 하는 것이 훌륭한 일이니까 1이 좋다든가 하는 식의 답변이었으면 쉽게 이해했을 텐데, 숫자 중에 제일 센게 9라서 좋다는 말은 당시의 나로서는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아마도 10이나 11처럼 9보다 큰 숫자를 만들 수 있다는데서 오는 의아함이었을 것이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 그때 나누었던 아버지와의 짧은 대화가 아직도 기억나는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나 분명한 것은 아들이 9라는 숫자를 매우 많이 보는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백화점이나 마트도 마찬가지지만 홈쇼핑에서도 9가 들어가는 가격이 대부분인 탓이다.
100,000원보다는 99,000원이라는 가격이, 1,000,000원보다는 990,000원이라는 가격이 쇼핑 업계에서는 고정값처럼 매겨져 있다.
100,000원과 99,000원의 차이는 1,000원에 불과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1만 원의 차이가 나는 느낌이 든다.
많은 소비자들이 그런 점을 모르는 것은 아닐 테지만, 상대적으로 99,000원이라는 가격에 지갑을 열 확률이 높다는 점을 쉽게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한 원인으로 심리학자인 쉰들러와 아이만은 ‘미결정 효과(under-determination effect)’라는 이론을 제시했다.
미결정 효과는 사람들이 정보를 오랜 시간 기억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을 우선적으로 기억하고, 숫자가 길면 길수록 맨 왼쪽의 것만 기억한다는 이론이다.
인간의 뇌는 효율적으로 작동하게끔 설계가 되어있기 때문에, 빠른 판단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중요한 정보만을 취하고 나머지는 버리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런저런 가격을 접할 때 뒤의 세세한 정보는 버리고 앞자리만 기억함으로써, 이것은 10만 원대, 저것은 9만 원대라는 식으로 굵직한 정보만 흡수하게 되는 것이다.
백화점이나 인터넷 쇼핑몰에서 상품을 볼 때, 세세한 가격까지 정확히 기억하면서 쇼핑한다고 상상해보라. 즐거워야 할 쇼핑이 매우 머리 아픈 일이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런 성향이 가격이 9로 끝나는 세일 기간에 구매를 더 하게 만드는 것을 보면, 효율적으로 작동하려는 뇌의 속성이 꼭 합리적인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9로 끝나는 가격이 구매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연구 결과를 보면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미결정 효과'라는 용어에 대해 하나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다.
이름을 'under-determination effect'라고 이름을 붙인 것을 보면 쉰들러와 아이만은 숫자 9가 사람들에게 '아직 결정되지 않았음'을 연상시키는 숫자라고 풀이한 것 같다.
즉 9는 9라는 숫자 자체의 의미보다 10에서 하나 모자란 수, 아직 10이라는 완전체에 도달하지 못한 미완의 수라는 이미지가 더 강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왜 '아홉수가 고비'라는 말이 존재하는지, 왜 '아흔아홉 섬 가진 사람이 한 섬 가진 사람의 것을 마저 빼앗으려 한다'는 속담이 만들어졌는지 짐작되는 부분이 있다.
숫자에도 운명이 있다면 9는 10이 되지 못한 수, 99는 100이 되지 못한 수라는, 슬픈 운명을 간직한 숫자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용이 되어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에게 우리는 어떤 시선을 보내고 있는가. 용이 되지 못한 슬픔과 한(恨)으로 점철된, 추악한 괴물의 이미지를 연상하게 되지 않는가.
목표에 근접했으나 결국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대상에 대해 우리는 어쩐지 박수보다는 안타까움과 연민의 시선을 보내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99점도 100점과 별 차이 없는 고득점이고, 어떤 면에서는 100점을 맞은 사람보다 99점을 맞은 사람에게 더 인간미가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목표를 100점으로 잡되, 99점이라는 결과에 대해 충분히 만족하고, 아흔아홉 섬을 가졌을 때 백섬을 채우려는 욕심을 부리는 것에서 자유로워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에서 9라는 숫자가 가장 센 숫자여서 좋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다시 한번 곱씹게 된다.
아버지께서는 비록 10에는 못 미치지만, 1부터 8까지의 숫자보다는 강하면서 10이라는 목표에 근접한 9를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큰 숫자라고 보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평생 큰 욕심부리지 않고 자족하면서 살아오신 당신의 삶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80줄에 접어들면서 노쇄해진 아버지는 분명 내가 어렸을 때 보던 강직한 아버지의 모습과는 많이 다름이 있다. 그러나 지나온 삶을 관통하는 당신만의 철학은 더욱 굳건해진 느낌이다.
가진 것 이상의 욕심은 내지 않으면서, 요행을 바라지 않고 물 흐르듯 흘러온 그 삶의 굴곡을 보니, 수십 년 전 행운의 숫자 운운하는 어린 아들에게 9를 좋아한다고 말씀하신 이유를 이제야 알 것도 같다.
아버지께서는 분명 당신의 아들도 9처럼 살기를 바라셨으리라.
그래서일까,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결정되지 않은’ 9라는 숫자가 참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도 아버지처럼 숫자 중에 9를 가장 좋아하게 됐음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