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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홈PD Jul 14. 2022

왜 남녀의 쇼핑 스타일은 서로 다를까

너무 힘든데 쇼핑은 하고 싶어 (9)

"어딜 가는 거요?"


아버지께서 신발을 신는 어머니께 물으셨다.


"요 앞에 마트를 가봐야지."

"또?"

"또라니. 이것저것 살게 있으니까 가는 거지."


요즘 어머니께서는 자주 마트에 가신다. 장 보러 마트를 가는 것이야 어머니 자유지만 예전 같지 않은 몸으로 힘들게 뭘 들고 오시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생기기도 한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잊고 있던 장면 하나가 슬그머니 떠올랐다.


대학생 시절 미국에 체류하면서 한인이 운영하는 마트의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캐시어로 일을 하다 보니 다양한 사람들과 계산대에서 부대끼지 않을 수 없었는데, 마트 위치가 빈민가 근처여서인지 행색이 남루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류는 너무 연로해 걷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할머니들이었다.

그들은 매일 오전 손님이 없을 무렵 출근하듯 마트에 와서는 느릿느릿 한참을 둘러본 후 1달러짜리 물건 하나를 겨우 계산하고 돌아가곤 했다.


처음 한두 번이야 그러려니 했지만 여든은 훨씬 넘어 보이는 할머니가 초라한 차림으로 겨우 사과 하나, 토마토 하나를 사가는 모습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점차 당혹스러워졌다.

동정의 눈길로 보자니 나 자신이 교만하게 느껴졌고, 존중의 눈길로 보자니 1달러는 너무 하찮은 금액이었던 탓이다.


특이한 건 그런 할머니들이 꽤 있었던 것에 반해 비슷한 행동을 보이는 할아버지들은 없었다는 점이다.




남녀가 백화점에서 다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더 이상 새로운 일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경우는 보통 사려고 했던걸 얼른 사고 돌아가자는 남자와 더 둘러보고 싶은 여자와의 대립이 주된 이유가 된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얼핏 남자는 쇼핑을 싫어하고 여자는 쇼핑을 좋아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남자들이 정말 쇼핑을 싫어한다고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남자들도 본인의 취미활동이나 관심분야와 관련된 상품에 큰돈을 지불하는 경우가 많은 까닭이다.


남녀의 쇼핑 스타일 차이를 알기 위해서는 ‘사바나 원칙’이라는 이론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사바나 원칙(The savanna principle)은 인간 두뇌 수준은 인류가 살던 초창기 시대에 머물러 있어 그 시대 이후 환경엔 인간이 적응하기 어렵다는 생물학적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즉 인류 역사 전체를 놓고 볼 때 구석기인들의 시대가 가장 길었기 때문에 현대 문명을 경험하고 있는 우리들이라 할 지라도 진화론적 관점에서는 여전히 구석기인들의 뇌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산업혁명이라고 해봐야 불과 200년 전이고 컴퓨터가 탄생한 것도 겨우 50년밖에 되지 않은 일이다. 현생인류의 의미 있는 진화가 1만 년 전부터 진행되어왔다고 한다면 현대 문명이라고 해본들 인류 역사 전체의 2% 정도만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잘 적응한 듯 보이긴 해도, 육체와 심리적인 진화의 상태는 초원에서 수렵하고 채집하던 선사시대 인류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진화심리학자들의 주장이다.

현대인들이 이성적인 듯 보이지만 자주 비합리적인 편향적 태도를 보이는 바탕에는 이러한 이유가 숨어있는 것이다.


그 옛날 채집을 하는 여자들은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독이 있는 열매를 골라내야 하는 능력이 필요했다. 책 같은 곳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없던 시절이었으니 채집을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고, 따라서 장시간 걷고 집중하면서 사물을 살피는 일에 익숙해졌을 것이다.


반면 남자들은 빠르게 움직이는 동물의 사냥을 위해 순발력과 민첩성, 그리고 무엇보다 목표물에 대한 강한 집중이 필요했다. 동적인 것을 상대했어야 했을 남자들에게는 장시간 걸으며 제대로 된 것을 골라내는 식의 섬세한 능력은 필요 역량이 아니었을 것이다.


학자들의 주장대로 이러한 뇌구조가 지금까지 이어져왔다면 남녀 간 쇼핑 스타일에 차이가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된다. 목적이 중요한 남자와 둘러보면서 좋은걸 골라내야 하는 여자의 스타일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남자가 여자의 스타일을 이해해야 하고 여자가 남자 스타일을 이해해야 한다는 뻔한 결론을 내고자 함이 아니다. 여자가 쇼핑하는 동안 남자의 시간이 허비되는 것도 문제가 있어 보이고, 남자의 가자는 보챔에 더 좋은걸 고를 수 있는 여자의 시간이 끊기는 것도 비합리적인 측면이 있다.

원한다면 여자가 쇼핑할 동안 남자가 흔쾌히 기다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식의 전략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서로가 윈윈 할 수 있는 꾀를 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20년 전 뉴저지 마트의 할머니들은 마트에서 무언가를 사는 것이 아니라 채집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마트를 방문하는 것이 하루 일과의 전부였을 수도 있는 그녀들에게 마트는 열매 가득한 하나의 초원이었을지도 모른다. 울긋불긋 빛나는 열매들 중 자기가 보기에 가장 예쁘고 빛깔이 좋은 하나를 고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고르고 골라 사온 과일 하나를 손주에게 정성스레 내밀었는지도.


그녀들은 가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평생 그러한 행위를 하면서 살아왔기에, 기력이 쇠해졌음에도 여전히 그러한 활동을 멈출 수 없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단 한 개의 사과만을 산다 해도 누가 그런 인류의 신성한 의식에 돌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끙차 하면서 작은 봇짐 하나를 매고 집을 나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이 갑자기 숭고해 보였다.

수십 년간 가족들에게 음식을 먹이고 집안 살림을 하면서 보내온 그 삶. DNA에 굳게 박혀있을 세상 어머니들의 깊디깊은 본능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 숭고함은 곧 수만 년을 흘러내려온 인류의 질긴 생명력을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벅찬 감동이 안개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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