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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홈PD Oct 10. 2022

왜 여행 일정은 빡빡하게 짜이기 십상일까

너무 힘든데 쇼핑은 하고 싶어 (10)

'빗장 풀린 해외여행'


이 뉴스 제목을 보고 반갑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물론, 굳이 취미를 여행이라고 적어내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사이다 같은 헤드라인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방학이나 휴가 때 해외여행 한 번씩은 다녀오는 사람이 태반인 시대 아니던가.


나 역시 아직 쓸 수 있는 휴가가 남아있기에 머릿속으로 여행 계획을 슬몃 떠올려보았다.


'저번에 가려다가 못 간 곳을 가볼까. 그런데 거기를 가면 근처의 다른 곳도 들러야 할 텐데... 그러면 거리가 멀어서 하루 만에 둘러보는 게 되나... 아침 일찍 출발하면 될 것 같은데...'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지만 이내 지워버렸다.

과거 빡빡한 일정에 맞춘 여행을 하다가 교통편이 끊겨 고생을 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딘지도 모르는 이국(異國)의 거리를 하염없이 걸으면서 더 이상 이런 힘든 여행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었다.


사람마다 추구하는 여행 스타일은 다르겠지만 내 경우에는 유독 랜드마크를 다 둘러보려는 욕심을 부린 적이 많았던 것 같다. 고생스럽더라도 그것을 다 봐야지만 여행을 제대로 하는 것이라고 느꼈던 탓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아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왜 나는 여행 일정을 빡빡하게 짜지 못해 안달이었던 것일까.




매몰비용(sunk cost)이란 어떤 선택의 번복 여부와 무관하게 회수할 수 없는 비용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어떤 것에 비용을 지불했을 때 돌려받을 수 없는, 엎질러진 물과 같은 비용이라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대부분의 소비가 매몰비용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매몰비용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엎질러진 물의 관점에서 보자면 매몰비용은 잊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 소비한 결과물 (유형이든 무형이든)이 존재하기에 잊는 길보다는 자신이 지불한 행위를 정당화하는 길을 선택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비싼 돈을 주고 청소기를 샀다면 그것을 자주 사용하여 편리한 생활을 만끽해야 합리적인 소비가 입증된다고 생각하는 식이다.


물론 이런 생각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 문제는 빡빡한 여행 일정으로 고생을 자초하는 일처럼, 자신이 한 소비를 합리적인 행위로 만드는 과정에 있어서 무리수를 두는 경우가 생긴다는 점이다.


여행자의 입장에서는 지불된 항공료와 숙박료 등은 돌려받을 수 없는 매몰비용이다. 따라서 여행지에서 무의미한 시간을 보낸다면 그 비용은 헛돈이 되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보니 어떻게든 유의미한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강박감을 갖기 쉬워지는데, 여행의 목적이 분명치 않았던 나는 랜드마크를 하나라도 더 보는 것이 소위 '본전'을 뽑는 길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매몰비용의 오류(sunk cost fallacy)란 이처럼 미래에 발생할 효용이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투자한 비용이 아까워서 하게 되는 일련의 행동들을 말한다.


나는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인 관광지 하나를 더 보려다 길을 잃고 헤매는 것에 어떤 이득이 있을까를 생각했어야 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여행에서 '의미'가 있고 없음은 오롯이 내가 정하는 것이다.

여행의 목적이 힐링인 사람에게는 푹 쉬다 오는 행위가 유의미한 행위가 될 것이고, 유적을 답사하는 것이 목적인 사람에게는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이 유의미한 행위가 될 것이다.


문제는 여행에서 무언가를 얻겠다 하는 고민도 없이 그냥 떠났던 나 같은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현지에서 조급한 마음에 허둥지둥 대다가 몸만 힘들어지기 십상이다.


'매몰비용의 오류'와 유사한 개념으로 '콩코드 오류'라는 말도 있다.

과거 가성비가 떨어지는 콩코드 여객기의 개발을 밀어붙이다가 막대한 손해를 본 일화에서 나온 말로, 잘못된 결정을 인정하지 않고 정당화하기 위해 밀고 나가는 행동을 뜻한다.


씁쓸하게도 이런 오류는 우리 생활에서 생각보다 자주 발견되곤 한다.


주가가 하락하는 종목을 처분하지 못하고 저가에 계속 주식을 주워 담아 평단가를 낮추는 이른바 '물타기'가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회사에 악재가 있으면 일단 처분해서 손실을 줄이는 것이 합리적인 행위라고 볼 수 있지만, 그동안 들어간 금액과 기다린 시간 등이 아까워서 단가를 낮추는 쪽으로 판단을 하는 것이다.


뷔페에 가면 이미 돈을 냈으니 최대한 많이 먹는 것이 이득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흔히 겪는 오류이다.

건강에 좋을 리가 없음에도 매몰비용에 대한 회수 심리가 발동해 과식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홈쇼핑 여행 상품 중 스테디셀러를 꼽으라면 '미국 서부/동부 일주' 같은 패키지 상품을 들 수 있다.

연령층이 높은 고객들 중심으로 미국 여행에 대한 수요는 늘 있는 편이었다. 그러나 PD 입장에서 방송 준비를 하다 보면 이런 상품을 추천하는 것이 맞는 일일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가격보다도 그 일정이 매력적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장거리 버스를 타고 자유의 여신상을 본 후 다시 몇 시간을 달려 워싱턴 DC를 들렸다가 또 그 버스를 장시간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에 도착하는 식이다.

사진 몇 장 찍으면 바로바로 버스에 올라타야 하는 빡빡한 일정이 어찌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여행사의 입장은 매우 달랐다.

나이 드신 분들에게 있어 미국 여행은 죽기 전에 꼭 한 번 둘러보고 사진을 찍어야 하는 버킷리스트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분들에게 미국은 여느 나라와는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곳이라는 말이다.

일정을 좀 여유롭게 가져가면 왜 빨리 출발 안 하느냐고 오히려 화를 내는 경우가 많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런 경우 빡빡한 여행 스케줄이 매몰비용 오류의 일환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평생에 한 번은 가봐야지 하는 곳을 내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힘든 일정이라도 유의미한 행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하고 있는 행위가 미래에 발생할 효용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느냐의 여부가 아닐까.


얼마 전부터 나는 여행을 하기 전 가장 중요한 목적 하나만 생각하곤 한다. 방문하고 싶은 관광지를 가든 먹고 싶은 음식을 먹으러 가든, 하나만을 생각하면 큰 무리 없이 유의미한 시간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여행 일정에 욕심을 부리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목적만을 가져가 보라고 조언하고 싶다. 그리고 여행을 떠났으면 이미 지불한 항공료와 숙박료는 잊으라고도 얘기하고 싶다.


매몰비용의 노예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야말로 유의미한 여행 만들기의 기본이 되는 것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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