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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십사 메가헤르츠 Mar 23. 2024

주얼리가 알려준 인생 수업

지금은 5교시 수업 중



S#1. 2024년 오클랜드


경력 단절을 겨우 끊어내고, 10년 만에 주얼리 쇼룸 앞에 섰다. 깨끗하고, 하얀 케이스 앞에서 조명을 받아 더 반짝거리는 제품들이 언제나 내 기분을 좋게 만든다.


오랜만에 만지다 보니 예전 기억이 떠오른다. 주얼리는 14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에게 인생을 가르쳐줬다.



S#2. 2007년 강동, 첫 번째 수업 - 주얼리세공


맞지 않는 신데렐라의 구두에 억지로 발을 끼워 넣듯 꼬깃꼬깃 맞춰온 전공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나에게 맞는 새로운 수업을 시작했다. 내가 주얼리 제작을 위해 처음 금속을 다뤄본 것은 2007년 어느 봄이었다.


작은 실버 덩어리를 불에 녹여 망치로 두드리고, 납작하게 뽑아내 줄질과 땜질하는 것을 배웠다. 낯선 곳에 도착한 듯 새롭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내가 겨우 만들어낸 반지는 그 무엇보다 둔탁하고, 줄질과 땜자국이 선명했지만 나의 첫 번째 작품이라는 생각에 큰 의미가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솜씨와는 달리 잘 만들고 싶은 열정과 욕심이 가득했다. 내가 지금껏 수업이라고 배워온 익숙한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게 주얼리 수업은 자유롭고, 즐거웠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계기가 되어 종로 공방들을 알게 됐고, ‘귀금속가공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주얼리 관련 업무를 하려면 기본적인 제작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남들과 다른 특별한 마법을 가진 것 마냥 색다른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S#3. 2008년 송파, 두 번째 수업 - 브랜드의 시스템


Romanson의 파인 주얼리 브랜드 E.S donna와 패션 주얼리 브랜드 J.estina 두 개의 사업부에서 근무를 했다.


이 회사에서 근무를 했을 때 가장 많은 일과 경험을 배웠다. 파인 주얼리라는 특성상 금속(금, 은, 플래티넘)과 고가의 보석(다이아몬드, 루비, 진주 등)을 다뤘는데 귀금속 가공과는 또 다른 매력이 철철 넘쳐흘렀다. 이때 '보석감정사'의 자격증을 또 하나 취득했다.


회사라는 공간에서는 작은 자재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새로운 디자인의 제품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전국 매장에 전달되어 고객에게 판매됐다. 회사에 있으면서 생산팀, 구매팀, 물류팀, 디자인팀, 마케팅팀, 인사팀 등이 상호작용을 통해 목표를 이루기까지 하나로 움직이는 시스템을 배웠다.


나는 큰 기계의 작은 나사 역할이었지만,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고 그것을 적용했을 때 돌아오는 피드백을 기대하는 일이 좋았다. 결과 역시 좋으면 '해냈다!‘라는 생각에 성취감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기술이라는 마법에 시스템이라는 새로운 주문을 알게 됐다.



S#4. 2010년 종로, 세 번째 수업 - 사람과 사람


회사를 다니며 잠깐 '귀금속경제신문사'의 기자로 활동했다.


그동안 제작과 시스템을 배웠다면 기자는 소식과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었다. 종로 한복판으로 출퇴근을 하며 일을 했다. 그때 선배기자를 통해 기본적인 글 쓰는 법과 인터뷰하는 법을 배웠다. 업계의 소식을 전하는 뉴스, 내가 콘셉트를 정하고 주얼리 소식을 모아 만드는 기획기사, 주얼리 업계에서 크고 작은 일을 해내고 있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신문에 실었다.


처음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지극히 'I'성격을 가진 나로서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실수와 경험을 통해 하나씩 배워나갔고, 서서히 익숙해졌다. 그리고 그때의 경험이 마법이 되어 지금도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하고 있다.



S#5. 2014년 서울 집, 네 번째 수업 - 마케팅


아기가 생기고 나서는 사회생활을 하는 것에 한계가 생겼다. 작고 작은 아이를 옆에 두고 일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웠지만, 나는 계속 일하고 싶었다.


아이가 잠자는 시간에 캐드로 주얼리를 그려 제작했고, 블로그를 이용해 판매를 시작했다. 그리고 집 앞 편집샵에 아기띠를 하고 찾아가 이렇게 물었다.


안녕하세요.
제가 만든 주얼리인데,
이곳에서 샵인샵(Shop-in-Shop) 개념으로
판매를 해도 될까요?

다행히 옷가게 사장님은 내 제품을 좋아해 주셨고, 수수료를 제외한 판매 금액을 통해 수입을 낼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기를 안고 주얼리를 잔뜩 들고 온 내 모습이 얼마나 웃겼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때의 그 용기는 지금도 칭찬해주고 싶다.


그렇게 나는 주얼리 케이스를 제작하고, 블로그(Online)와 샵(Offline)에서 판매를 했다. 마법 같은 내 경험들을 모아 만든 내 첫 번째 브랜드는 지금에 와서 봐도 여전히 사랑스럽다.


S#6. 2024년 오클랜드, 다섯 번째 수업 - 용기


이민이라는 이벤트로 내 첫 번째 브랜드는 정리됐다. 그리고 육아, 이민 정착, 적응이라는 길고 긴 시간이 지나고 주얼리 쇼룸 판매(Sales assistant)로 다시 일을 시작했다. 매장에서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에게 제품을 설명하고, 판매를 한다.


경력단절을 끊고, 사회로 나오는데 아니, 영어권 사회로 나오는 데까지 정말 큰 용기가 필요했다. 자신이 없어서 포기한 적, 머뭇거렸던 시간, 주춤했던 적도 있었다. 넘어져서 피가 났고, 그 피를 변명삼아 내 불안, 떨림, 긴장을 눈물에 감춰 흘려댔다. 그리고 또다시 일어났다. 몇 번을 넘어지고 몇 번을 일어섰는지 모른다. 그 긴 시간을 거쳐 지금의 자리에 서있다.


그동안 모아 온 마법 주문과 주얼리가 가르쳐 준 인생을 통해 나는 이곳에서 나만의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5년 뒤의 나는 또 무엇을 배우고 있을까, 얼마나 더 넘어져 크고 작은 딱지들이 생겼을까, 그때는 더 단단해져 지금처럼 울지는 않겠지.


2007년의 나는 2024년에도 지구 아래쪽에서 주얼리 일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혹여나 그때의 어린 나를 다시 만난다면 정말 많은 마법과 주문을 익힐 테니 조급해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재미있게 하라고 전해주고 싶다.


한쪽으로 치우쳐 기울어진 주얼리를 다시 예쁘게 진열하며 나의 소중한 수업들을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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