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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십사 메가헤르츠 Sep 11. 2023

혼자 선비처럼 살으리랏다

남편에게 보내는 헌정 편지

우리가 같이 산 세월이 벌써 11년이구려. 알고 지낸 시간까지 포함하면 20년이라는 긴 세월을 함께 알고 지냈소.


연애할 적엔 사회생활기간이 더 긴 내가 군대, 유학 등으로 취업이 늦은 당신을 얕잡아본 적도 있었소. 그리고 순하고 곱게 자란 당신이 가족이라는 구성원을 책임지고 살 수 있을지 의심이 든 적도 있었소.


하지만 첫째 아이가 생기고  혼자서 생계를 책임지면서, 이민 와서 영주권 받기까지 고생하면서, 내가 당신을 인정을 넘어 존경하게 되었소.


그러는 새에 당신은 아주 현실적이고, 감정 없는 로봇 같은 성향으로 바뀌어갔지만 원래 그런 성격이었다는 당신의 말에 연애할 적 당신이 너무 낯설게만 느껴졌소.


몇 달 전 당신 쉬는 평일날, 내가 출근하는 10년 만의 기이 현상이 벌어졌는데 잘 다녀오라며 인사하던 당신의 미소가 지금도 선명히 떠오르오. 그런데 몇 달 만에 일을 정리하는 바람에 그 미소는 더 이상 보기 힘들어졌소. 아니, 그 경험을 겪고 난 후로 하루하루가 더 힘들고 지쳐 보였소.


내 다시 취업을 준비하고 있지만 마음같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답답한 이 내 마음 또한 어찌하리오. 그래도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운동하고, 페인트 칠하고, 일러스트 그리고, 글 써가며 혼자서 둠칫거리고 있소.


하지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 모두가 취미의 모습이지 돈을 버는 것은 아니지 않소! 조선시대였으면 나 혼자 선비처럼 방에 앉아 책을 읽고, 당신은 밭에 나가 일을 하는 모습이 아니겠소! 오호~통제라~


그런데 사실 조금은, 아주 조금은 글 쓰고, 그림 그릴 때 행복함을 느끼오. 그래서 이렇게 혼자 있는 시간에 컴퓨터 앞에 앉아 타자를 두드리는데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당신에게 미안하오.


고맙소. 양반집 가문의 딸로 태어난 것도 아니라 부모에게서 받을 것도 없거니와 이렇게 선비처럼 앉아만 있는 나를 데리고 살아줘서 감사하오. 내 모든 일에 열심히 포기 없이 하다가 좋은 기회가 오면 꼭 잡겠다고 당신에게 약속하오. 아니, 기회를 기다리지만은 않고 지금처럼 계속 찾겠나 가겠다고 약속하오. 그리고 나에게 기회가 생기면 당신에게 쉴 수 있는 기간을 주겠소. 부디 그 시기에 바람피우거나 도박 같은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길 바라오.


내 말이 길어졌소만, 그만큼 당신을 향한 애정이 큰 것이라는 걸 잊지 말아줬으면 하오. 사랑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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