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게나 하나쯤은 있다. 발작버튼
사람마다 일종의 “발작 버튼”이 있다. 예를 들어 가족 또는 외모 얘기가 나오면 예민하게 반응하는 둥. 결국 그렇게 자기 약점이 드러나는 셈인데, 내 아킬레스건을 지키고자 자기방어 기제가 나타나 더 사납게 구는 것이다. 나의 발작 버튼은 “누군가 나를 무시할 때”이다. 나는 내가 무시당하는 상황을 참을 수 없어 그들에게 더 날카롭게 말하거나, 그 상황에서 돈을 더 쓴다.
그렇다. 돈을 많이 쓰는 것. 이것이 문제다. 더 큰 문제는 이제 내가 백수가 되었다는 거다. 모아둔 돈은 한정되어 있는데 써야 할 돈은 오히려 더 많아진다. 누군가 나를 백수라고 무시하는 꼴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발작 버튼이 제대로 눌린 날이 있었다. 퇴사 후 떠난 제주도 여행, 공항 면세점에서 향수를 구경했다. 여행에서 향수를 새로 사서 뿌리는 것도 좋은 추억이니 작은 사이즈를 살까 고민했다. 큰 사이즈는 정말 필요 없었다. 그런데 나를 담당하던 직원이 작은 사이즈는 없고 큰 사이즈는 12만 원이라며 퉁명스럽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나는 손에 들고 있던 향수를 큰 사이즈로 달라고 말했다. 향수를 사고 뒤돌자마자 후회했다. 내 돈!
그때 나는 그 직원에게 오히려 더 친절하게 “네, 고생하시네요. 많이 파세요”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앞에 진상 손님이 있었나 보다, 생각하고 넘길 수도 있었다. 누군가 나를 찌르면 더 날카로운 가시로 다른 이를 찌르는 게 아니라 그냥 “아야” 소리를 내고 넘겼어야 했다. 살 수도, 살 필요도 없던 향수를 객기 부리며 사서는 안됐다.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건 내 수준을 알고, 그만큼에도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말하고도 행복한 사람. 나라는 사람에게 한계는 없다는 자신감보다는 나에게도 한계가 있다고 인정할 줄 아는 겸손함. 이게 정답은 아니겠지만 난 그렇게 동글동글한 어른이 되고 싶다. 요즘 나는 그 향수를 뿌리며 “오늘은 좀 더 나은 어른이 되어보자”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사진: Minjung Kim <Trace>, 갤러리 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