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시월이 열렸다.
10월 1일 화요일
노란 낙엽들이 가슴 시리게 하는 아름다운 시월이 열렸다.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문득 떠나고 싶은 계절. 마음이 설레는 계절이 이리도 빨리 찾아왔구나. 버스라도 타고 노란 숲 속을 찾아가 볼까. 아직 뉴욕은 노랗게 물들지 않았다. 대개 10월 말 11월 초가 되어야 노란 숲 속을 만날 수 있다. 어쩌면 다른 지역은 뉴욕보다 더 빨리 노랗게 물들지도 모르겠다. 가슴 시리게 하는 시월에 행복한 추억을 많이 만들 수 있을까.
맨해튼으로 향해 달리는 7호선 안에서 슬픈 아코디언과 기타의 선율을 들으며 가난한 이민자의 동네의 풍경도 바라보았다. 유에스 오픈 테니스 경기가 열리는 Flushing Meadows Corona Park 숲도 조금씩 조금씩 노랗게 물들어가고 있다.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들의 경기를 엊그제 본 거 같은데 스포츠 축제는 이미 막이 내리고 추억만 남았다.
지하철에서 내려 맨해튼 미드타운에 도착 한잔의 커피를 마시며 J가 남긴 연보랏빛 책 이기주 작가의 <언어의 온도>를 펴서 읽기 시작했다.
참 귀한 선물이다. 뉴욕에도 한국 책이 없지 않지만 책값이 비싸서 구입한 적이 없다. 한국에서 건너오는 것은 다 비싸다. 이민 가방 몇 개 들고 낯선 도시 뉴욕에 와서 공부하고 일하는 동안 한국에서 출판된 책들을 읽을 꿈도 꾸지 못한 채 세월은 잔인하게 흘러가고 말았다. 오랜만에 한국어로 된 책을 펴고 오랜 빈 공백 기간을 메우나 보다.
한국에서는 논픽션을 거의 읽지 않았는데 뉴욕에서는 주로 논픽션을 자주 읽는다. 그렇게 차츰차츰 뉴욕 문화에 접하면서 뉴욕 문화 속으로 조금씩 들어간다. 가끔은 전문 서적도 읽고 잡지도 읽고 소설책도 읽는다.
어릴 적 외국에서 사는 꿈을 꾸었다. 꿈이 영원히 꿈으로 남을 줄 알았는데 어느 날 뉴욕에 와서 살고 있다. 외국에 살면 뭐가 가장 불편할까 늘 생각했다. 책을 읽지 못한 슬픔이 클 거 같았다. 그때는 외국어로 적힌 책을 읽는다고 생각조차 못하고 한국어도 된 책을 읽지 못하면 어떡하지 걱정을 했다. 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걱정은 미리 할 필요도 없다.
뉴욕에서 공부하고 살다 보니 영어로 된 책을 읽을 수 있다. 대학 시절 깨알 같은 크기로 적힌 타임지와 뉴스위크지 등을 정기 구독한 적도 있지만 분량도 많고 영어 사전에서 찾아야 할 단어들도 너무 많아서 포기했다. 지금은 어렵지 않게 신문과 잡지와 소설책을 읽을 수 있어서 책 읽기의 굶주림에 허덕이지 않는다. 언제든 북카페에 가면 마음껏 신간을 읽을 수 있어서 좋기도 하다. 아마존의 위력이 거대하니 언제 오프라인 서점 반스 앤 노블 북카페가 사라질까 늘 염려도 하지만 아직은 북카페를 운영한다.
나의 경험으로 보자면 책은 인생의 자양분이 된다. 어릴 적부터 책을 사랑하고 자주 읽으며 꿈을 꾸곤 했다. 읽은 책을 다 기억할 수 없지만 저 깊숙한 곳에서 차곡차곡 쌓였는지 모른다. 번역된 소설책을 읽으며 서구 문화를 접해서인지 뉴욕에 와서 대학 시절 꿈꾸던 세상을 만났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아마도 난 책을 읽으며 그런 상상을 하고 꿈을 꾼 듯하다.
그때도 대학생들의 주관심은 취업과 연애였다. 난 늘 미래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늘 고민하고 생각했다. 칠흑처럼 캄캄한 세상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그때는 지금과 너무 다른 세상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세계 여행을 하고 인터넷으로 다양한 정보를 접하면서 살지만 그때는 한국 일반인들에게 세계여행조차 허락하지 않았을 때.
그때 책을 읽으며 꿈을 꾸었다. 가난했던 대학생 시절 수중에 1000원이 있다면 무얼 할 수 있을까 자주 생각도 했다. 그런 질문이 아이비리그 대학 인터뷰에 나왔을 때 학생들이 곤혹을 치렀다고 하니 놀랐다. 내게는 너무나 쉬운 질문이었는데. 100원짜리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도서관에서 신문과 잡지를 읽고 시내버스를 타고 종점부터 종점까지 달려보면서 관찰하기 등 수많은 생각의 지도를 머릿속에 그렸다.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으로 매달 음반과 책 몇 권을 사고 얼마나 행복했던가.
뉴욕에 와서 대학 시절 들은 노래를 들으면 놀랍다. 시월의 첫날 맨해튼 미드타운 나의 아지트에서도 브라이언 아담스의 <Heaven > 노래가 들려왔다.
<언어의 온도> 책을 읽으며 음악을 들으며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행복했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행복 찾기 놀이는 나의 숙제.
저녁 7시 반 줄리아드 학교에서 공연이 열리고 미리 박스 오피스에서 티켓을 구입하지 않아서 박스 오피스가 문을 닫기 전 학교에 도착해야 하니 책을 덮고 걷기 시작했다. 가을이 짙어가는 센트럴파크를 거닐려다 그냥 콜럼버스 서클을 지나 링컨 센터로 향하는 길 도로에서 달리는 마차를 보았다.
바빠서 센트럴파크에 가지 않은 날 위로하는 선물이었나. 마차가 달리는 거리 풍경은 언제나 낭만 가득해 좋다. 매일 같은 곳에서 구걸하는 중국인 할머니도 지나고 링컨 스퀘어 단테 파크 근처에서 노란 바나나 1불어치 사서 가방에 담고 링컨 센터 분수를 바라보며 나 혼자 중얼거렸다. 사랑아 솟아오르렴, 희망과 꿈아 솟아오르렴, 하고.
줄리아드 학교에 6시가 되기 전 도착 저녁 7시 반 공연 티켓 한 장 받아 줄리아드 학교 나무 계단에 앉아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을 했다. 57회 뉴욕 영화제가 열리는 엘니노 부닌 먼로 필름 센터 앞에는 영화를 보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고,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사람들도 보고, 횡단보도에서 걷는 사람들도 보고, 차들은 도로 위를 쌩쌩 달렸다. 저마다 행복을 찾아서 달리겠지.
대개 줄리아드 학교 공연 티켓은 미리 배분하는데 인기 많은 공연 티켓은 일찍 매진되는데 시월의 첫날 열린 New Juilliard Ensemble 공연은 컨템퍼러리 곡이고 대개 늦게 가도 표를 구할 수 있다. 현대곡이라서 가끔 이해가 어렵기도 하는데 자주 듣다 보면 귀가 조금씩 열린 듯하다. 프로그램을 받고 홀에 들어가 뒤편에 앉아서 낯선 음악을 감상했다. 맨해튼에 산다면 밤늦게까지 공연을 보고 싶은데 휴식 시간 나와버렸다. 아무래도 너무 늦을 거 같아서.
뉴욕 영화제가 열리는 링컨 센터는 영화팬들이 많았다. 티켓값이 저렴하다면 보고 싶은 영화도 있는데 눈을 감아야 하는 현실.
지하철을 타고 타임 스퀘어 역에서 플러싱에 가는 7호선에 환승. 플러싱에 내려서 텅텅 비어 가는 하얀색 냉장고를 채우기 위해 장을 보려다 아름다운 10월 첫날이라 약간 여유를 부리고 싶어서 미뤘다. 여유는 스스로 찾아야지. 하루 늦게 장을 본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닌데 하면서 시내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풀벌레 소리 들리는 가을밤은 점점 깊어만 가고 걱정과 시름은 저 멀리 사라지길 기도했지.
시월의 장미꽃도 보고, 책도 읽고, 음악도 감상하며 글쓰기도 하면서 시월의 첫날을 보냈다. 슬픈 일은 떠나고 즐겁고 기쁜 일 가득한 시월이 되면 좋겠다. 모두에게 행복한 시월이 열리길 바라본다.
시월이 열리니 황동규 시인의 <시월> 시도 생각났는데 동시 릴케의 <가을날> 시도 생각났는데 우연히 두 번이나 가을날 시를 읽었다. 대학 시절 처음으로 릴케의 시를 읽으며 얼마나 가슴이 두근두근했던가. 수업이 끝나고 대학 교정에 음악이 울려 퍼질 때 잔디밭에 앉아서 휴식을 하면서 책을 읽으면 얼마나 행복했던가.
릴케가 독일 뮌헨에서 만난 루 살로메는 어떤 여인이었을까. 차 한잔 마시며 아름다운 음악도 들으면서 그녀랑 대화를 나누고 싶구나. 자꾸 상상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아직 난 젊은가. 지금도 대학시절처럼 꿈을 꾸며 행복하니까. 누가 내 꿈을 막겠어. 나 혼자 꿈꾸는데. 부단히 노력하면 꿈이 이뤄지기도 하지.
생은 뜻대로 안 되고 너무너무 슬픈 일도 많지만 폭풍 앞에 무너지면 안 돼. 폭풍은 지나간다. 폭풍은 지나간다. 폭풍이 지나가면 더 좋은 날이 올 거야. 그리 믿고 살자꾸나.
시월 우리 사이좋게 지내자.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만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