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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적인 다닐 트리포노프
피아노 공연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_김승희

by 김지수

10월 16일 수요일


종일 가을비가 내렸다. 거리에 낙엽은 뒹굴고 거센 바람이 불었다. 거리에서 천만 개의 빗방울 동그라미도 봤다. 이 비가 그치면 사람들의 고독과 아픔과 쓸쓸함은 사라질 거야. 그렇지 않아.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고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 돌고 돈다. 만물의 진리다. 항상 인생이 꽃피는 봄인 사람이 어디 있겠니. 희망과 사랑으로 씨를 뿌리고 매일 가꾸다 보면 세월이 흘러가면 장미정원으로 변할 거야.


맨해튼 지하철과 거리에는 홈리스들이 참 많다. 우울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도 많다. 지하철을 탔는데 붕대로 다리를 돌돌 만 홈리스가 "집에 아무것도 없어요. 어린 딸과 함께 살아요. 도와주세요."라고 하니 참 슬펐다. 귀족들도 가난뱅이도 많이 사는 뉴욕 맨해튼. 가슴마다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 홈리스와 아픈 사람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다함께 행복하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노랗게 물들어 가는 시월의 나무를 보며 내 인생은 어디만큼 가고 있나 생각에 잠겼다. 아무것도 모르고 왔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왔는데 매일 지하철을 타고 맨해튼 거리를 걷다 보니 대학시절 꿈꾸던 보물섬도 발견했다. 어디로 가는 걸까. 어디로 가는 걸까. 가끔 내게 묻고 싶다. 어둠이 물러가면 빛이 올 거라고 믿고 싶다. 항상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으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어린 두 자녀 데리고 뉴욕에 와서 아주 천천히 가장 낮은 곳에서 내가 원하는 삶을 만들어 가고 있다. 아픔 가득한 뉴욕 생활이지만 희망과 꿈과 사랑으로 행복하게 즐겁게 살려고 노력한다.



IMG_1346.jpg?type=w966 사진 오른쪽 다닐 트리포노프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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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 뚝뚝 떨어지는 수요일 저녁 아들과 함께 카네기 홀에서 다닐 트리포노프(Daniil Trifonov) 공연도 감상했다. 내가 잘 모른 낯선 피아니스트 Sergei Babayan랑 듀엣으로 연주를 했다. 카네기 홀의 메인 홀 스턴 홀에는 두 대의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늘 그러하듯 발코니 석에 앉아 피아노 연주를 들었다. 전날 만난 베를린 피아니스트는 만날 수 없었다. 그도 발코니 석이 비좁다고 말했다. 왜 하필 그 많고 많은 좌석 가운데 내 옆자리에 않으셨을까.


서정적인 멜로디의 슈만 곡도 감상하고 내가 사랑하는 라흐마니노프 곡도 감상했지만 아들과 날 감동시켰던 곡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곡이었다. 프로코피예프의 라이브 곡을 한국에서 들을 기회조차 없었는데 줄리아드 학생들이 연주를 해서 가끔씩 듣곤 했다. 엄청난 에너지를 요구하는데 연주가에 따라 더 멋진 곡이 되기도 하고 아닌 경우도 있다. 듀엣 연주를 듣는 가을밤은 황홀했다. 잠시 천상에서 산책을 했다. 어쩜 그리 멋지게 연주를 하는지 몰라. 평소 프로코피예프의 곡을 안 좋아하는 아들도 피아노 듀엣 연주가 너무 좋았다고. 감동적인 연주였다. 마지막 라벨 곡 연주도 좋았다. 퍼커션 연주도 있던 라벨 곡은 마치 재즈 음악 같았다. 대학 시절 라벨의 '볼레로'곡을 무척 사랑했는데 맨해튼 음대 피아노 대회에서 라벨의 왼손을 위한 협주곡을 들으며 반해버렸다. 한 손을 위한 협주곡인데 왜 그리 멋진지 몰라.


이틀 연속 카네기 홀에서 공연을 보는 것이 맨해튼에 살지 않은 내게는 상당히 힘들다. 집에 돌아오면 거의 자정이 되어간다. 그래서 갈지 말지 고민하다 갔는데 역시 트리포노프였다. 젊은 러시아 피아니스트 참 대단하다. 두 피아니스트의 호흡도 잘 맞았다. 함께 연습도 많이 했을 거라 짐작했다.


플러싱에 사니 앙코르 곡도 듣지 못하고 떠났다. 가을비는 내리고 카네기 홀 바로 옆 지하철 운행은 안 하니 불편했다.


러시아 피아니스트가 카네기 홀에서 공연을 하면 음악을 사랑하는 러시아 이민자들도 온다.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피아노 전공을 했던 나타샤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민 온 할아버지도 만났다. 카네기 홀에서 자주 만나는 중국인 시니어 벤자민과 수잔 할머니는 만나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걱정도 했다. 하늘 높은 꼭대기 발코니석에서 늘 보는 두 명의 노인들도 보았다.


가을비가 내려 맨해튼 로어 이스트사이드 아트 축제는 방문하지 않았다. 가을비 맞으며 걸을 에너지가 없었나 봐. 낯선 화가 만나서 사는 이야기 들으면 좋을 텐데 아쉽다. 맨해튼 음대에서 열리는 특별 공연도 볼 수 없었다. 하필 다닐 트리포노프 공연과 스케줄이 겹쳐서.


뉴욕 영화제도 지난 13일 막이 내리고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도 상영했는데 영화감독도 만나고 영화도 보았으면 좋을 텐데 아쉽다. 인터넷에서 기생충 영화 스토리만 읽었다. 빈부차 심한 한국 사회를 담은 영화였다. 짧은 영화 스토리 읽기도 내겐 벅찼다. 공포였다. 사람도 변하고 세상도 변하고 영화도 변하고 있다. 첼시 갤러리 그림도 변하고 있었다. 더 좋은 세상이 오면 좋을 텐데 여기저기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는 세상 어디나 정치가 썩었다고 말한다. 서민들 삶은 갈수록 어려워진다고. 김승희 시인의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시도 생각난다. 힘들고 지치고 우울할 때 날 위로했던 김승희의 시.



가장 낮은 곳에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뜨리지 않는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그래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목숨을 끊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천사 같은 김종삼, 박재삼,
그런 착한 마음을 버려선 못쓴다고
부도가 나서 길거리로 쫓겨나고
인기 여배우가 골방에서 목을 매고
뇌출혈로 쓰러져
말 한마디 못 해도 가족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
중환자실 환자 옆에서도
힘을 내어 웃으며 살아가는 가족들의 마음속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 가장 아름다운 것 속에
더 아름다운 피 묻은 이름,
그 가장 서러운 것 속에 더 타오르는 찬란한 꿈
누구나 다 그런 섬에 살면서도
세상의 어느 지도에도 알려지지 않은 섬,
그래서 더 신비한 섬,
그래서 더 가꾸고 싶은 섬, 그래도
그대 가슴속의 따스한 미소와 장밋빛 체온
이글이글 사랑에 눈이 부신 영광의 함성
그래도라는 섬에서
그래도 부둥켜안고
그래도 손만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강을 다 건너 빛의 뗏목에 올라서리라,
어디엔가 걱정 근심 다 내려놓은 평화로운
그래도, 거기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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