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8일 금요일
아름다운 가을 햇살 비추는 시월 중순에 이르렀는데 왜 갑자기 겨울처럼 추운 거야. 마음이 꽁꽁 얼어붙을 정도로 추웠다. 거리에서 잠을 자는 가련한 홈리스도 파란색 담요를 덮고 있었다. 어느새 겨울 외투를 입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 시월 중순. 마음은 어디론가 멀리 여행을 떠나고 싶다. 무엇보다 한국의 황금 들판이 그립고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감나무도 그립다. 그리운 설악산도 한라산도 내장산도 단풍으로 물들겠다.
가을은 가을이나 보다. 잊고 지낸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났다.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서 오래오래 지내다 보니 연락이 두절됐다. 이민 초기 스마트폰을 산 것도 아니고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 아들이 학교에서 숙제를 해야 하는데 스마트폰이 필요하는데 함께 수업받는 학생 가운데 아들 혼자 없다고 불평해서 마음먹고 구입했다. 그때 내 스마트폰도 구입했다. 그리운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불러본다.
아무것도 모르고 이민 가방 몇 개 들고 힘든 이민 생활하면서 보고 읽고 듣고 느낀 것을 정리해 <미국 이민과 유학을 꿈꾸는 분들> 브런치 북을 발간했다. 준비되지 못한 분들에게는 지옥 같은 고통의 시작이다. 아, 그 누가 알겠는가.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것만 보인다. 수억 가지 삶의 색채들. 모두 드라마 같은 인생이라 책 10권 정도는 가볍게 쓸 거 같다는 이민 생활. 운이 좋은 경우도 있지만 보통 사람은 언어와 신분 문제로 힘들 수밖에 없다. 뉴욕에서 만났던 모든 분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보통 사람들 이야기를 담지도 못했겠지.
늦은 오후 맨해튼에 갔다. 지하철에는 싱글맘 홈리스가 구걸을 하는데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얼마 전에도 <싱글맘 육아일기> 브런치 북에 댓글을 남겼더니 '힘이 된다고' 하셨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안부를 남기면 좋겠는데 뉴욕 생활이 늘 바쁘기만 하다. 맨해튼에 산 것도 아니고 매일 출퇴근하면서 매일 기록하고 매일 살림하고 등. 우선순위를 정해서 할 수밖에 없다. 젊을 적도 그랬고 항상 그렇게 살아왔다. 내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운이 좋았을까. 늦은 오후 카네기 홀 박스 오피스에 도착해 혹시 저렴한 티켓 남아있냐고 물었다. 운 좋게 한 장을 구입했다. 직원에게 감사의 미소를 짓고 저녁 8시 <NY Pops> 공연 티켓을 받았다. 기쁨 가득한 마음에 춤을 추고 싶었다.
저녁 8시가 지나 공연이 시작되었다. 프로그램 읽으니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레미제라블> 앤디 윌리엄스 메들리 등 내가 아는 곡도 잘 모른 곡들도 많았다. 앤디 윌리엄스 노래를 들으니 고등학교 단짝 친구도 생각났다. 음악을 좋아하던 친구는 아직도 교직에 종사할까. 전 세계 사람들을 눈물바다로 만든 영화 <러브 스토리>에 앤디 윌리암스가 부른 노래가 흐른다. 아주 오래전 한국에서 러브 스토리 영화 볼 때는 여자 주인공이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이란 게 무얼 의미한지도 몰랐다. 뉴욕에 와서 이민 1세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니 이민자란 단어가 다르게 느껴진다. 남자 주인공 집안은 하버드 대학 빌딩에 이름을 새길 정도로 명성 높은 집안. 하버드 대학에서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고 여자 주인공은 하늘나라로 떠나고 마는 슬픈 영화였지. 앤디 윌리엄스 목소리가 참 감미로웠다.
뉴욕 팝스랑 노래를 부른 Jeremy Jordan 목소리도 감미로웠다. 내가 잘 모른 낯선 곡도 얼마나 예쁘던지 황홀한 가을밤이었다. 음악이 뭘까. 천상의 멜로디를 들으면 잠시 지상의 고통이 사라지고 만다. 날 위로한 음악이 없었다면 난 어찌 지냈을까.
뮤지컬 "WAITRESS"에 흐른 곡도 정말 좋았다. 오래전 만난 쿠바 출신 중년 여자도 생각난다. 재혼한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재산 상속 문제가 아주 복잡해 변호사 찾아가니 비용이 비싸서 혼자서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 해결하고 기쁜 마음에 주위 사람들에게 한 턱 냈다고. 퀸즈 도서관에서 만난 남자 친구랑 함께 그 뮤지컬 봤는데 너무나 좋다고 하셨다. 한국에서 뮤지컬을 볼 기회조차 없었는데 뉴욕에 와서 차츰차츰 뮤지컬 세상에 노출되었다. 어린 시절 쥴리 앤드류스가 출연한 <사운드 오브 뮤직> 영화 속에서 처음으로 뮤지컬을 접했다. 어마어마한 자본이 들어서 비싼 뮤지컬. 비싸서 자주 볼 수 없지만. 아들도 오페라보다는 뮤지컬이 더 좋다고. 아들과 함께 뮤지컬 본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러갔다.
아들도 뉴욕 팝스 공연을 좋아하는데 컨디션이 안 좋아 집에 있고 싶다고 하니 나 혼자 봤는데 안타까웠다. 다닐 트리포노프처럼 이 시대의 거장 피아니스트 공연도 좋지만 클래식 음악이 아니어도 좋다. 감동을 주면 다 좋지.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따뜻함. 재능 많은 뮤지컬 가수였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따뜻한 커피도 마시며 <한국수필 10월호>를 읽기 시작했다. <비 오는 날의 행복> 수필이 참 좋았다. 어렵고 힘들 때 떠오르는 위대한 인물 헬렌 켈러. 그녀가 쓴 <내가 사흘만 볼 수 있다면> 글은 얼마나 감동적인가. 보통 사람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일인데 그녀에게는 위대한 선물이다.
책과 음악과 함께 했던 행복한 하루였다. 재능 많은 뮤지컬 배우도 알게 되니 더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