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여자라고 나와 같은 마음으로 이해해주는 건 아니었다.
임신인 걸 알았을 때 스쳐간 많은 생각 중에 가장 큰 걱정은 당연하고도 슬프게도 직장 생활이었다.
팀장에게는 언제 알려야 할까, 이직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임신했다고 하면 얼마나 많은 입방아에 오를까, 평가 철인데 이 사실을 알렸다가 평가 등급이 조정되기라도 한다면 너무 억울할 것 같은데
등등등의 직장과 관련된 생각으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조차도 나의 현재를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데 이 와중에 직장 걱정이라는 것 자체가 넌덜머리가 났다. 아니지 이건 현실이었다. 직장인이 임신을 마주했을 때의 현실. 이것은 임신 초기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지극히 보편적이고 현실적인 직장인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다.
임신을 인지하고 3주 동안 매주 난임과로 진료를 받으러 갔어야 했다. 임신 몇 주가 되었는지 매주 바뀌던 시기, 내 자궁에 자리를 잡은 점 하나가 아기가 된다는 것이 숫자로만 확인이 되던 시기, 나를 낳아 여태껏 기른 이들에게도 말하기 조차 조심스러웠던 때였다.
나의 잦은 휴가 소진을 오해하고 있을 팀장에게 예고 없이 불쑥 임신을 고했다. 무게를 잡고 심각하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임신을 기정사실 화 하기 어려운 시점은 아니고 싶었다.
임신한 거 같다(워딩이 구리다고 생각했지만, 이것에 확신이 없기 때문에 병원에 자주 가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팀장에게 주고 싶었을지 모른다) 내일도 검사받으면 확실해진다(그러니까 그간 매주 쓴 연차와 내일 쓸 연차 오해하지 마라) 모레 있을 회식도 걱정이다(몸의 변화로 술을 못 마시니 이해 바란다. 잘 방어해줘라)
정도로 이야기를 했다. 내가 담백하게 이야기했는지 혹은 초조하게 이야기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나조차도 임신에 대해 확신이 없고 불확실한 상황이지만 그런 날 붙잡고 내년도 팀 운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팀장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의리였다.
이 날의 모든 건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가 언제, 어디에서 이야기를 했다 정도의 기억이 전부이고 디테일한 것들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래도 명확하게 기억이 나는 건 임신•출산을 이미 경험한 여자와 갓 임신을 한 여자가 나눌 수 있는 공감대와 동료애는 없었다는 것(내가 그걸 기대했던 모양이다). 당분간은 회사에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의견과 그래도 본부 전체로 하는 첫 회식 참석은 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팀장이 준 임신 고백에 대한 피드백이었던 것 같다. 내가 굳이 알 필요가 없는 팀장의 얼굴 위로 지나간 다양한 감정은 그 사람이 감당할 몫으로 두었다. 물론 잘 되진 않았다. 다만, 나를 배려하지 않고 본인의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에게 내가 그것까지 살피고 공감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나조차도 현재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운데 육아휴직을 얼마나 쓸지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본인은 출산 휴가 3개월만 쉬고 출근했다는 십몇 년 전의 무용담을 말하며 나에게도 3개월만 쉴 것을 은연중에 강요하는(물론 그건 내 경력을 들먹이며 앞으로의 직장 생활을 걱정해주는 듯 마치 나를 신경 써주는 것처럼 이야기를 했다. 근데 이게 가스 라이팅이라며?) 것부터가 직장에서 시작된 폭력이었다.
내가 육아 휴직을 6개월을 쓸지, 1년을 쓸지 아직 디테일하게 고민도 못해봤는데 팀장은 자신과 자신 주변의 사례를 들며 아이가 초등학교 갈 때 육휴를 쓰는 것이 오히려 더 좋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말 뜻은 지금 당장 육휴를 짧게 쓰라는 의미인 건가??? 당장 1년 뒤조차도 가늠이 안 되는 나에게 8년 뒤의 미래는 예상하고 지금 의사결정을 하라고??? 그러면서도 출산과 동시에 회사를 그만둔 또 다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먹이며 너도 그만둘 거면 미리 이야기하라고 엄포를 놓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현재는 뱃속에 점으로 있는 이 세포가 8년 뒤에 학교를 가는 그 시점에 과연 내가 회사를 다니고 있을지, 다닌다고 하더라도 그 시점에 과연 내가 육휴를 쓸 수 있을지(지금도 이렇게 못 쓰게 오만 사례를 다 들면서 이야기를 하면서???) 물론 8년 뒤에는 이 여자 밑에서 일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그렇다고 초등학교 입학 준비로 육휴 쓰는 걸 반기는 상사도 그리 많지 않겠지만 말이다. 나는 그리 계획적인 인간이 아니기도 해서 너무 멀어서 잡히지도 않는 불확실한 미래를 지금 시점에서 미리 염두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11월 후반부(막 7주가 되던 시기였다)에 팀장에게 임신을 고하고, 중간중간 그녀에게 끊임없는 몸평을 당하다가(어떤 옷을 입고 가면 배가 나온 것 같다고 남들 다 들리게 속삭이질 않나, 또 어떤 날엔 아직도 임산부 같지 않으니 팀 사람들에게는 말 안 해도 되겠다고 한다거나 등등등의 몸매와 관련한 온갖 참견들) 20~21주부터 눈에 보이게 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더 심각해지는 그녀의 악의 없는 몸평을 더 이상 참기 힘들어 22주가 되는 3월 중순의 팀 주간 회의 날에 팀원들에게 임신을 알렸다. 그리고 그녀에게도 이제 나에 대한 몸평 좀 그만하라고 말했던 날이었다
물론 팀 사람들은 나의 임신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그도 그럴 것이 정말 16주까지는 배가 나오지 않아서 나조차도 내가 임부임을 잊을 정도였다. 초산은 배가 늦게 나온다고 하더라) 17~18주부터 배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때마다 배가 나온 거 같다고 반려인에게 엄청난 호들갑을 떨었지만 그조차도 겨울이라는 계절의 특수성으로 옷으로 커버가 되어 주변 사람들은 더더욱이 몰랐을 수밖에 없겠지.
그동안 술을 먹지 않은 이유가 위염이라고 했던 건 다 뻥이었냐고 이 또한 악의 없이 물어보는 해맑은 신입에게 너도 내 입장이 되어 보면 어떤 거짓말이 가장 그럴싸했겠니,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회사에서 자행되는 악의 없는 말과 행동들이 임부인 나에게는 얼마나 폭력으로 와닿았는지 가해를 한 그들은 결코 모를 것이다.
그렇게 임신 21주가 되도록 팀에 알릴 수가 없어서 누리지 못한 임신 초기의 단축 근무는 실체는 있으나 나에게는 적용되지 못한 한낱 허상 같았다. 아무리 입덧이 없고 겉으로 보이는 몸의 변화가 없어도 내 안에서 치러지는 전쟁 같은 변화에 체력은 빠르게 소진되었다. 출퇴근길엔 핑크 마패를 차고 다녔고(그래 봐야 배려석에 앉은 날은 손에 꼽힌다. 왜들 그렇게 임신도 안 했는데 임부석에 앉아 가시는지??) 가끔 노약자석에 운이 좋아 앉아 가는 날에는 날 기어이 일으켜내고 앉으려는 으르신도 있었지만(나와 핑크 마패를 번갈아 보며 임신했대잖아,라고 핀잔을 받았던 날은 잊을 수가 없다) 아빠 연배의 아저씨들이 오히려 더 양보를 해주기도 했고, 나와 비슷한 나이의 남자들이 양보를 해주기도 했다(아마 나랑 비슷한 나이의 딸이 있거나, 와이프가 있는 사람들로 추정된다).
같은 여자들이 더하다, 는 그 말을 믿지 않으려고 했지만 나의 팀장도, 지하철에서 만나는 엄마 연배의 여자분들도 나도 해봐서 아는데, 나도 다 겪어본 거야, 로 나를 대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여실하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내가 사회 초년생인 시절에 임부로 회사 업무에 열심히 임했던 선배 생각이 많이 났다. 그때의 내가 바라봤던 선배의 모습이 나에게는 오지 않을 막연한 미래 같았는데 지금의 내가 딱 그 모습이 되어 그때의 선배를 생각하는 것이 역설 같았다. 그때는 지금보다 덜 하지 않았을 임부를 향한 폭력적인 시선 아래에서 회사 생활을 했을 선배는 지금의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줄까. 그 어떤 조언을 구한다고 해도 결코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지 않을 그 선배 생각이 요즘 부쩍 난다. 연락을 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