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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ete Oct 25. 2018

좁은 골목길의 사우다드

포르투, 내 인생의 붉은 혁명을 찾아서

사우다드. 그리움, 향수, 외로움. 이런 말로 대치되지 않는 말이라 했다. 굳이 말하자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그리움’에 가까운 말이라고 읽었다. 고기를 잡기 위해, 무역을 하기 위해, 전쟁을 위해,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바다로 떠난 남자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 그들. 전장에서 죽고 성난 자연에게 먹히고 다른 나라에 정착해버렸다. 돌아오지 않는 남편, 애인, 아들, 아버지를 기다리며 리스본 언덕에서 통곡하는 여인들의 ‘한’에 가까운 정서를 ‘사우다드’라 했다.


그 정서는 반드시 리스본 언덕이 아니라도 느낄 수 있다. 포르투 대성당 언덕. 그곳에선 유럽의 해변 도시 특유의 벽돌색 지붕들을 내려다볼 수 있다. 도우루 강에 인접한 벽돌색 지붕들을 바라보노라면, 내 안 깊숙한 곳에 간직되어 있던 사우다드가 문득 형체를 드러낸다. 그리움. 흘러가고 있는 생에 대한? 죽은 이에 대한? 잃어버린 이에 대한? 무엇일까. 딱히 대상이 없는, 결코 가 닿을 수 없는 ‘무엇’에 대한 그리움. 살다가, 걷다가, 일하다가, 사랑하다가, 문득 마주하는 심층 지하 속 깊은 정서를 언젠가부터 나는 ‘영원에 대한 그리움’이라 부르기로 했다. 그 그리움을 오늘 포르투 대성당 언덕에서 맞닥뜨렸다.  

포르투 대성당에서 내려오는 좁은 계단길은 더욱 사우다드를 경험하게 한다. 수천 년 축적된 역사 속 좁은 골목길을 내려가다보면, 있을 법하지 않은 곳에 숨어 있는 레스토랑과 야외 테이블에서 때 이른 점심을 먹고 있는 종업원들을 발견하게 된다. 비둘기들이 이쪽 편 건물에서 저쪽 편 건물로 얼마 안 되는 거리를 갑자기 떼 지어 이동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작은 창문으로 아래의 관광객들을 내려다보며 담배를 피우는, 낡은 티셔츠의 남성도 시야에 들어온다. 작은 게스트하우스에서 세탁물을 옮기는 할아버지도 마음속에 스며든다. 여행객들은 잠깐의 시간 동안 천상의 음식과 와인, 음악과 풍경을 누리며 쉬고 가지만, 뒷골목에선 하루하루 노동을 하고, 돈을 벌고, 특별할 것 없는 주식을 먹고, 잠시 담배를 피우며 쉬어가는 노동자들이 있다. 이런 장면들이야말로, 낭만적이고 여유롭고 유유한 환상을 자아내는 도우루 강변의 풍경 뒤편에 가려진 이면이다. 이 이면들이 그 환상들을 받쳐주고 있다, 수면 아래에서. 난 언제나 수면 아래를 더 사랑하는 모양이다. 아니, 사랑이라기보다 자동적인 끌림이다.

뒷골목은 도우루 강변의 아름다운 레스토랑으로 이어졌다. 뒷골목의 마지막 문을 열자 퍼스트클래스가 나온 기분이랄까. 설국열차의 맨 앞칸 같았다. 그러나 나의 허영은 앞칸도 사랑한다. 뒷칸은 자동적으로 끌리고 앞칸은 허영의 욕구를 채워준다. 그 유명한 대구 요리를 먹었다. 종업원의 추천에 따라 선택한 대구구이에 감자와 양파 등을 섞은 요리인데, 우리 집 강아지가 씹지 않고 음식을 넘기는 이유를 알았다. 너무 맛있어서 씹기까지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저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릴 뿐이었다. 햇살에 반짝이는 강과 그 위를 미끄러지는 유람선, 그것을 바라보며 대구 요리를 먹자니,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내가 가장 행복한 사람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은 ‘찰나’였다. 겨우 이 ‘찰나’를 경험하기 위해 사람들은 이런 곳을 여행하는 것인가. 음영이 잘 드러나지 않는 지역의 여행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나도 음영에 지쳤나. “삶에서 이미 음영은 충분해! 여행지는 음영이 없는 곳으로!”

20대에 만났던 남자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삶과 너무 일치하는 영화는 보기 싫어요. 생각 없이 보는 액션 영화가 좋아요. 이미 삶만으로 충분히 무겁거든요.” 그러고 보니 그는 20대부터 표정이 무거웠다.

뉘엿뉘엿 해가 지고, 해의 자리를 보름달과 조명이 대체할 무렵, 나는 도우루 강변 벤치에 앉아 음악을 들었다. 거리의 예술가는 연인과 함께 곧 잠들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른한 목소리만 아니라 그 표정까지도 포르투 밤의 향기에 취하게 했다. 닿지 못할 것에 대한 사우다드와 나른한 천상의 행복. 그 두 가지의 공존을 생생한 이미지로 보여주는 곳, 포르투. 그림자는 빛이 있어야 숨을 쉴 수 있고, 빛은 그림자가 있어야 의미가 있다는 걸, 넌 보여주고 있는 거니.


#포르투여행 #유럽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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