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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드리셋 Aug 15. 2024

여자가 아프면 남자가 짜증 난다는 말

어느 쪽이 되었든 측은지심으로!


한동안 잠잠하다가 며칠 전에 또 목이 말썽이라 침을 맞고 왔다. 피도 빼고 부항도 뜨고 그렇게 목 근처에 시뻘건 페퍼로니를 잔뜩 찍어내고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거는데 문득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집에서 여자가 아프면 남자가 짜증 난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이 말을 자주 들었다. 엄만 간염도 있었고 허리디스크도 있었다. 몸이 허약하고 자주 안 좋은 전업주부였다. 아무리 아빠가 녹즙도 갈아주고 했다 해도 스스로 미안함이 있었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아직까지도 나한테 저런 말을 한다. 근데 내가 결혼해서 살다 보니 반대의 경우도 더러(아니 꽤 자주) 있는 게 아닌가? 아무래도 ‘여자’ ‘남자’는 빼고 말하는 게 낫겠어 엄마!






남편이 당뇨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진단을 받았다. 마흔도 채 되기 전이다. 유전이니 언젠간 오겠거니 했지만 이렇게 빠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심란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당뇨가 엄청 진행된 것도 아니고, 요즘 젊은 사람들 당뇨도 많은데 뭐 그렇게 유난스럽냐 할 수 있지만, 배우자의 상황과 입장과 감정이란 것이 또 있기 마련이거든요...  

  

동네 내과 의사의 퉁명스럽고 쌀쌀맞은 설명에 나는 진첫날부터 인터넷에 의지했다. 당뇨가 어떤 병인지, 인슐린과 췌장과 혈당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의사보다 상세히 설명하는 글들을 찾아 읽고, 어느 병원에서 재검을 받을지, 당뇨 전문 내과에 갈지 대학병원에 갈지 고민을 했다. 당뇨인들이 모인 커뮤니티에 가입했고, 어떤 음식을 끊어야 하고 먹어야 할지 찾아보았다. 환자 본인보다 배우자인 내가 발을 더 동동거렸다. 검색을 하고, 이해하고, 식단을 고민한 지 3일째. 나에게도 과부하가 온 거 같았다.


하위 3프로인 아이들, 백미든 밀가루든 기름이든 신경 쓰지 말고 잔뜩 해 먹이라는 성장센터 의사의 말에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해주고 있는데, 식단관리가 8할인 당뇨 앞에서 이제 밥상을 어떻게 차려야 할까? 난 주부 9단도 아닌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아이들이 잘 안 커도 내 탓, 남편의 당수치가 높아져도 다 내 탓이 될 거란 생각이 들자 조금 망연해졌다. 대단한 건 아니어도 있는 힘 쥐어 짜내서 열심히 평일 집밥을 해 먹고, 주말은 좀 편한 마음으로 외식을 즐기곤 했는데. 식탁을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나에게 남은 건 이제 더 퍽퍽한 매일밖에 없단 생각에 마음이 울적해졌다.     


엄마, 이쯤 되면 한 번 바꿔 말해봐도 될까? 감기도 나보다 자주 걸리는 이 남자. 당뇨관리까지 해야 하는 이 남자. 직장 다니면서 남자가 맨날 아프다 아프다 하니까 내가 좀 짜증이 나더라고! 으슬으슬하다며 휴가 내고 안방에 누워 핸드폰 보고 있으면 때마다 밥 차리는 건 나고. 오히려 남자가 아프니 살림이랑 부엌일 맡고 있는 내가 할 일이 더 많아. 거기다 책임까지 많아. 혈당 오르면 그거 또 내 탓 같고. 진짜 솔직해져 보자고. 아프다 아프다 하는 남편 짜증 안 나는 아내가 몇 명이나 있을까?     


근데 이 와중에 역지사지의 정신이 발휘되는 걸 보니 우아직(?) 사랑하는 부부가 맞긴 한가보다. 자기 몸은 자기가 더 열심히 챙겨야지 왜 내가 더 안달이지? 하며 화가 나다가도, 내가 병났을 때 남편이 옆에서 한숨만 쉬고 나보고 알아서 몸 챙기라 하면 난 얼마나 서럽고 서운할까 싶은 것이다. 우린 너무 확실하게 ‘부부’라는 배를 타 버렸다.     

부부는 ‘측은지심’이면 다 된다더니. 내가 코로나에 걸려 고생할 때 열심히 수발들어준 남편이 떠올랐다. 잡곡을 사러 시장에 가는 게 내가 할 일이다! 평소 적게 사던 야채도 좀 더 많이 사 왔다. 4일 치의 현미보리밥을 지어 소분해 얼렸다. 계란도 오랜만에 삶아보았다. 방울토마토와 두부를 썰고, 당류가 적은 드레싱을 고루 뿌려 샐러드를 만들었다. 샐러드를 만들 때마다 왜 브런치집 메뉴가 비싼지 알겠는 게, 재료비도 재료비지만 이게 은근히 손이 많이 갑니다... 야채 씻고 물기 빼고 토핑들 손질하고! 때론 이것저것 조합해 레싱 만들기도, 버터에 새우를 굽기도, 마늘을 볶기도 하고.(확실히 손이 많이 갈수록 맛있다!) 완벽하게 하려고 해서 지치지 말고 나빠지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만 해보자 싶었다. 평소 안 만들던 샐러드를 이렇게 만들어보네. 측은지심의 샐러드!    

 

‘집에 있으면서’ 아픈 게 문제도 아니고, ‘여자’가 아픈 게 문제도 아니다. 부부가 살면서 서로가 아프면 걱정되는 게 당연하고, 걱정과는 별개로 배우자가 아프면서 생기게 되는 어떤 공백 메꿔야할 일들에 옆사람은 힘들어질 수 있다. 아픈 사람의 짜증과 기분을 받아줘야 하는 일도 쉽지 않으니 옆사람의 지침도 당연하다.

그렇게 서로 주고 받으며(?) 살기로 한 이상 측은지심의 마음을 갖는 수밖에. 어쩔 수 없는 한숨이 나오는 건 수발과 책임의 무게 때문도 맞지만 사실 조금 더 들여다보면 사랑이 있을 거다. 사랑하니까, 이 시람과 오래오래 건강하게 함께하고 싶으니까.

오늘은 과일가게에 들러 예약해 놓은 블루베리를 찾고, 냉동실에 넣어둔 두부텐더를 구워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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