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름 정말 힘들었다. 더위가 사람을 이렇게까지 무기력하게 만들 수 있구나. 음식을 주제로 연재글을 쓰고 있단 게 민망할 정도로 ‘밥 좀 안 하고 살 수 없나?’를 매일 생각한 여름방학이었다. 기온이 높아질수록 식탁은 부실해져만 갔다. 한 달의 사투 끝에 개학을 했고, 더 좋은 반찬을 만들었으면 좋았겠지만 개학 첫날엔 만만한 어묵국을 끓였다. 겨울에 먹어야 제맛인 것도 알고, 무를 넣어봤자 여름이라 무 맛이 좀 별로일 거 같기도 했지만 그래도 냉장고에 어묵이 한 봉지 있으니.
“엄마. 무에서 좀 쓴 맛이 나.”
국그릇을 비운 둘째가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첫째가 말하길..
“원래 여름무는 좀 써. 겨울무는 달고.”
너네 제법이다? 맛도 아주 기똥차게 아네. 그리고 겨울무가 단 건 어떻게 알았대? 얼마 전 예능 <언니네 산지직송>에서 박해진 배우가 여름무는 좀 쓰다고 했더니 염정아 배우가 이런 것도 아냐며 깜짝 놀라던데. 나 잠깐 그녀의 기분이 되었다!
언니네 산지직송 5회
나는 까다로운 듯 하지만 입이 은근히 둔하다. 남들이 쌀이 어쩌고 밥맛이 어쩌고 해도 잘 모른다. 특별히 이상하지 않으면 다 그게 그거 같다. 그리고 편식을 그렇게 해서(이런 연재글을 쓰면서 이실직고할 내용은 아닌 거 같지만) 겨울 대파가 맛있네 어쩌네 해도 대파를 안 먹기 때문에(?) 또 잘 모른다. 그럼에도 내가 ‘어머, 이래서 제철, 제철, 하는 거야?’라고 느꼈던 적이 몇 번 있다. 어묵국의 여름무도 그중 하나다. 그리고 ‘봄날의 주꾸미’를 빼놓을 수 없다. 전자는 맛없어서 알게 됐던 거라면 후자는 반대의 경우다.
3월의 주꾸미는 우리 동네 보배반점 쟁반짜장에서 시작되었다. 온갖 해물이 다 들어간 쟁반짜장. 사실 흔한 메뉴다. 식당을 잘못 선택하면 해물 토핑도 진짜 별로일 때가 있다. 종종 가던 보배반점이니까 믿고 쟁반짜장을 시켰는데, 푸짐한 요리 위에 주꾸미가 잔뜩 올라가 있었다. 보기만 해도 되게 윤기가 돌고 통통한 게 아주 구미를 잡아당기는 거였다. 나는 해산물 마니아도 아닌데 그랬다. 짜장이랑 버무려 한 입 맛을 보는데 세상에, 이 주꾸미 뭔데 이렇게 야들야들하지? 보들보들하면서 질기지 않고 쫄깃하다. 주꾸미도 촉촉할 수 있나? 나는 그날 알았다.
‘이래서 사람들이 제철, 제철, 하는구나?’
다음 날 기어이 하나로마트에 갔다. 주꾸미를 사러. 지금 이날이라면 양념장을 좀 못 만들고 대충 볶아도 주꾸미 볶음이 맛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보배반점에서 얻었기 때문이다. 수산물 코너에서는 오징어만 손질해 주셨기에 나는 통통한 생물 주꾸미를 우리집 양푼에 담그고 한참을 주꾸미랑 내외했다. 사람하고만 눈맞춤 못하는 I형인 줄 알았는데 나 주꾸미랑도 눈 못 마주치네... 무서웠지만 어쩌겠습니까. 해내야죠. 내 손으로 한 봄 주꾸미 요리 맛봐야죠! 내장도 빼고 밀가루로 벅벅 씻고 무심하게 툭툭 잘라 매콤한 양념장에 버무렸다. 빨개진 주꾸미를 센 불에 볶아내 깻잎이랑 생김, 통조림 옥수수, 마요네즈와 함께 세팅하니 주꾸미 맛집 부럽지 않다. 요리는 내가 했지만 제철이 8할 정도 만들었을까?
3월은 토실하고 보드라운 주꾸미를 허락했고, 삶도 그때에만 허락하는 것들이 있는 것 같다. 지금이 지나면 다시는 못 만날지 모르는 일들. 놓치면 끝일지도 모르는 장면들. 아직은 나를 외면하지 않는 6학년 3학년 1학년 아이들과 지지고 볶는 지금이 얼마나 빛나는 순간들인지 사실 나는 잘 모른다. 고등학생 키우는 언니들이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라고 해도 정작 난 지금의 기쁨들을 모른다. 그저 버겁고 화나고 자주 우울감을 느낄 뿐이다. 이때만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우리 집안 곳곳에 정말 많을 텐데 어리석은 나는 매일 모른다.(내가 요즘 육아가 너무 힘에 부쳐서 이런 글을 쓰는 게 아니다...... 사실은 맞다...)
곤충 잡으러 나가는 아이, 포켓몬스터로 브롤스타즈로 하나 되는 형제들,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다 같이 모여 저녁 먹는 시간, 본격 학업 스트레스 없이 즐겁기만 한 지금, 아직은 내 손도 허그도 거부하지 않고 엄마밥이 제일 맛있다고 해주는 아이들, 받아쓰기며 피아노며 하나씩 이루어나가는 얘네들의 작은 성취.(실은 밥상 앞에서 벌어지는 싸움과, 양치 전쟁과, 스마트폰 전쟁에 대해 더 나열할 말이 많지만 오늘만큼은 반대의 경우를 애써 생각해 본다.) 다신 돌아오지 않을 제철. 이때만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잘 누려야 할 텐데 현실은 눈앞의 버거움에 치여 쉽게 소진되고 만다. 생애주기 제철에 누려야 할 기쁨들은 봄날의 주꾸미가 주는 기쁨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이고 깊을 텐데 말이다.
유튜버 입짧은 햇님이 언젠가 말했다. 제철음식을 먹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걸 몇 번이나 즐기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맞네. 맛있어서 먹어야 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얘기일지도 모른다. 내년에도 그 맛을 또 누릴 수 있을 거라생각하는 건 오산이 맞다. 음식에 있어서도 삶에 있어서도 기억하고 싶은 말이다.
<언니네 산지직송> 지난 회차에서 멤버들이 도토리묵을 비름나물이랑 같이 무쳐 먹었다. 제철 나물의 맛에 대해 다들 연신 최고, 최고를 외치면서! 나물 잘 안 먹는 나도 군침이 돌았다. 초여름의 비름나물과 겨울의 달달한 무, 봄날의 주꾸미. 오직 이때만 누릴 수 있는 최대치의 행복. 맛있는 음식 자체도 큰 낙이지만, 음식을 둘러싼 내 일상과 사람들 그 안에서의 기쁨을 잘 누리는 매일을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