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이야기를 쓰고 싶어서 이 브런치북을 만들었지만, 음식 이야기 읽는 걸 좋아한 게 먼저였다. 여러 작가들이 함께 쓴 <요즘 사는 맛>도 재미있게 읽었고, 공지영 작가의 <딸에게 주는 레시피>도 인상 깊게 읽었다. 하나 더 빼놓을 수 없는 음식 에세이가 미야시타나츠 작가의 <바다거북 수프를 끓이자>인데, 거기 나온 사소한 한 문장을 나는 잊지 못한다.
‘어쩌면 매실 작업을 소화해 내야 어엿한 주부라는 식의 배짱도 있었을지 모른다.’
매년 매실을 대량으로 절이는 집에선 자란 글쓴이가 한 말이다.
엄마한테 반찬을 잘 얻어먹지 않는다. 엄마는 항상 뭐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어 하지만, 나는 밑반찬을 많이 두고 먹는 스타일도 아니고, 그냥 먹고 싶은 거 그때그때 해먹을 테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도 엄마가 기어이 뭐 하나 해주겠다고 할 때면 꼭 주문한 것이 있다. 소고기 장조림. 어려운 요리가 아닌 건 분명한데 이상하게 자신이 없었다. 고기를 찢어야 해서 손이 많이 가고, 푹 끓이고 조리는 시간이 오래 걸려 꺼려지는 걸까? 근데 닭 삶고 찢어야 하는 닭곰탕은 잘만 만드는데? 모르겠다. 그냥 엄마가 한 게 진하고 맛있어서 내가 해봤자 어차피 저런 정통 장조림의(?) 맛을 내는 건 불가능하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던 거 같다. 된장찌개는 그냥 아무나 끓여도 장조림은 아무나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 저 색을 입히고 저 맛을 내는 건 어려울 것 같았다. 소고기는 그냥 다른 식으로 먹지 뭐, 굳이 장조림씩이나!
그랬던 내가 장조림을 직접 만들기로 마음먹은 건 순전히 스타우브 냄비 때문이었다.(연재글을 읽어온 독자들은 알겠지만, 덕질하다가 들이게 된 그 냄비 말이다!) 거기에 수육을 해도 맛있고 장조림을 해도 아아아주 맛있게 된다나 뭐라나... 안 그래도 냄비의 본전을 뽑고 싶었던 내가 그런 정보에 귀가 팔랑이지 않을 리가 없지. 우둔살 한 덩이와 대파, 다시마, 표고기둥을 넣어 푹 삶아 육수를 냈다. 고기를 꺼내 한 김 식히고 결대로 열심히 찢었다. 메추리알까지 삶아 까기는 일이 많아서 깐 메추리를 사서 넣고. 매콤한 향과 맛, 초록의 예쁨을 위해 꽈리고추도 잊지 않았다. 찢은 고기와 재료들, 간장, 설탕, 후추를 육수에 넣고 다시 부르르 끓이고 있자니 제법 장조림다운 냄새가(간장 조림 냄새가 뭐 다 비슷하긴 할 거 같지만) 부엌을 채운다. 어느 정도 조려지고 간장 색이 잘 밴 고기를 하나 건져 맛을 봤다.
‘이거 성공이다!’
장조림 자체의 맛도 맛이지만 내가 맛본 건 ‘이거 됐다’는 뿌듯함의 맛이었다. 이 냄비로 솥밥 말고 다른 거 한번 만들어보자는 욕망... 아니고 도전정신에서 시작해 결과적으로 냄비 본전 이상을 얻었다.
나 이제 장조림 할 줄 아는 사람 됐네!
해보니 별거 아니네!
미야시타나츠 작가가 말한 ‘어엿한 주부’가 된 느낌이었다. 엄마한테 얻어만 먹던 반찬, 나는 못 할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반찬을 내 손으로 해냈을 때의 기분이란. 장조림 하나가 뭐라고, 누가 보면 감자탕이라도 끓이고 김장이라도 한 줄 알겠다. 장조림을 특정해 썼지만 비슷한 기분을 느꼈던 반찬 몇 개가 더 있다. 우엉조림과 파김치다.
할머니 우엉조림만 먹어 본 둘째가 ‘엄마는 우엉조림 못하잖아.’라고 나를 도발해서 시도했던 우엉조림. 생전 처음 흙 묻은 우엉을 사고 손질해서 진갈색의 우엉조림을 성공했을 때, 둘째가 ‘엄마 것도 맛있네?’ 하고 인정해 줬을 때, 나는 어깨가 쑤우욱 올라갔다.
<전지적 참견 시점>에 나온 이영자 파김치가 맛있어 보여서, 파김치 좋아하는 남편 생각에 홀린 듯 쪽파를 사 온 날이 있었다. 김장은 못 해도 이건 해볼 만하다 싶었다. 꽃게액젓으로 맛을 내고 하루 꼬박 숙성시켜 저녁밥상에 서프라이즈로 내놓고 신이 났던 날. 그런 날이면 나는 혼자 ‘어엿한 주부’가 된 기분을 느꼈다.
쓰고 보니 조금 웃긴다. 내 손으로 배추김치라도 담그는 날이 오면 폭죽이라도 터뜨릴 기세잖아? 몇억짜리 프로젝트를 따온 것도 아니고 무슨 대의를 이룬 것도 아니지만 집에서 이뤄낸 나만의 결과물이 소중하다. 일상적인 활동에서의 성공경험이 주는 에너지가 있다. 그건 맛있는 장조림이 될 수도, 깨끗하게 정돈된 집이 될 수도, 운동 개근이 될 수도, 꾸준한 연재글 업로드가 될 수도 있다.
전업주부로 살며 자존감이 떨어지는 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날. 애써 잘할 수 있는 요리 하나를 만들면서 기분을 바꾸려고 할 때가 있다. 할 줄 아는 건 밥밖에 없나? 밥상만 차리려고 사는 건가? 하는 생각으로 자존감이 떨어지는 건데 결국 다시 음식을 하면서 되찾는 자존감이라니 아이러니하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다. 단순한 끼니 준비 이상의 의미라고, 꽤 뿌듯한 보상이라고 내 몸과 정신이 말한다.
평소에 잘하는 요리여도 좋고, 새롭게 도전해 보는 요리도 좋다(실패에 관대해질 것!). 나를 위한 밥상도 가족이나 친구를 위한 밥상도 좋다. 당연히, 요리가 아니어도, 장조림과 파김치가 아니어도 좋다. 그게 무엇일지는 삶의 맥락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스스로가 어엿하게 여겨지는 작은 순간을 그러모으면서. 자존감은 그렇게 쌓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