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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드리셋 Aug 08. 2024

레시피를 정확하게 남겨둬야 하는 뜻밖의 이유

음식이 그리움이 되는 순간

6학년 아들은 내가 끓인 얼갈이배춧국을 좋아한다. 어느 계절에 먹어도 맛있긴 하지만 얼갈이가 제철인 추운 겨울 저녁에 뜨뜻하게 밥 말아주면 애가 밥을 두 그릇씩 먹는다. 지난 겨울 배춧국을 후루룩 먹으면서 아들이 말했다.     


"엄마 이거 레시피를 어디다가 꼭 좀 적어놔 줘."

"왜? 네가 해보게?"

"아니. 나중에 엄마가 나보다 먼저 고 없으면 똑같이 해 먹어야 하잖아."

   

....너 T야? 넌 무슨 맛있다는 말을 그렇게 슬프게...? 무섭게...? 사실적으로...? 아니 이걸 뭐랄까, 아무튼 뭐 그렇게 하니 아들...     


하지만 아들과 비슷한 마음이었던 적이 나도 있다.






우체국 택배 상자 3호와 10년 된 김치냉장고 김치통의 크기가 마치 짠 듯이 꼭 맞는다는 사실을 지난 겨울에 알았다. 택배로 김장김치가 도착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세 상자나. 이리로 이사오지 않았다면 아마 친정에서 같이 김치를 담그고 보쌈을 삶았을 것이다. 그리고 차에 김치를 실어 옆동네인 우리집으로 넘어갔겠지. 엄마와 떨어져 지방에 살게 된 건 처음이었다. 남편은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고, 나는 장거리 운전이 안 되고. 엄마는 허리 디스크로 오래 차를 타는 게 힘들었다. 아직 김치 하나 담글 줄 모르는 딸에게 엄마는 1년 치 귀한 식량을 이렇게 보내고야 말았다.   

  

엄마가 김치를 보내겠다 했을 때, 절대로 보내지 말라고 했다. 3-4있으면 박서방도 시간 여유가 생기니 그때 가지러 가겠다는 걸 엄마, 아빠는 한사코 거부했다. 박서방 일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고, 너네 새김치 좋아하니까 조금이라도 익기 전에 맛보라는 거였다. 김치가 꽉 들어찬 김치통 세 개를 아빠는 차에 실어 우체국으로 갔을 테다. 3호 박스를 사고, 접고, 김치통을 담고, 테이프로 튼튼히 상자를 감았을 거다. 그렇게 김장김치 세 박스는 충청남도 작은 마을까지 날아왔다.     


김치를 받고 엄마한테 바로 전화를 했다.      

"이렇게나 많이 보내셨어. 내년부턴 우리도 그냥 김치 사 먹자. 요즘 김장김치도 맛있는 거 많이 나와. 아무리 조금 한대도 엄마 아빠 둘이서 하기엔 노동이 많잖아."  

   

이런 말을 처음 한 건 아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다.     

"뭘 사 먹어. 파는 게 얼마나 비싼데. 그리고 정말 양이 많지 않아서 이 정도는 매년 해도 돼. 우리가 아직 기력이 있잖아."   

  

엄마는 움직일 수만 있다면 기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디스크가 다시 도져서 종아리가 자주 저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발에 쥐가 난다면서. 의자에 한 시간 앉아있기도 힘들어 충남까지 차 타고 오지도 못하면서. 엄마 아빠가 쥐어짜 낸 기력으로 만든 김치를 딸은 또 별수 없이 넙죽 받아먹는다.


마침 방학이라 아이들이 모두 집에 있던 그날 점심. 오랜만에 들깨미역국을 끓였다. 그리고 오전에 도착한 새 김치를 한 덩이 꺼내 썰었다. 다른 반찬은 없다. 밥상을 다 차리기도 전에 입안에서 도는 군침을 막을 자 누구냐... 슴슴한 들깨미역국에 따끈한 쌀밥을 말아 쭉 찢은 김장김치와 함께 숟가락에 올렸다. 아... 입이 짧은 나지만 이대로 밥 세 그릇은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김치를 잘라 아이들 식판에 담아주면서 생각했다. 정말 어쩔 수 없이 김치를 사 먹을 수밖에 없는 날이 오면 엄마김치가 너무 생각날 것 같다고. 엄마김치가 먹고 싶어도 못 먹는 날이 언젠가는 올 텐데 그러면 아무리 대단하다는 데서 김치를 주문해 먹는대도, 또는 내가 요리고수가 되어 김치를 잘 담그게 된대도 엄마의 김장김치를 그리워하지 않을 재간이 없을 거라고.

김치도 김치지만 그보다는 엄마가 더 그립겠지. 김치맛보다는 엄마의 마음을 더 느끼고 싶겠지. 그 커다란 그리움을 나는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주문한 김치 맛이 성에 안 차면 '그 겨울 엄마 김치 정말 맛있었는데' 하고 엄마를 떠올릴 것이고, 김치 맛이 너무 좋으면 '이 좋은 걸 엄만 진작 안 사 먹고 괜히 고생만 하고.' 라며 엄마를 떠올릴 것 같았다.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엄마한테 빨리 김치 만드는 법 전수받을 생각 안 했는데, 저 열세 살 아들이 나한테 미리미리 배춧국 레시피 남겨놓으란 말을 하다니... 나보다 네가 낫네! 그냥 웃고 넘겼지만 사실 그건 너에게도 나에게도 너무 중요한 문제 맞지. 어떤 음식은 그리움이기도 하니까. 음식이 그리움이 되는 순간이 분명히 오니까.     

근데 나는 얼갈이배춧국 레시피를 정확하게 계량해서 써놓을 수 있는데 너네 외할머니는 ‘몇 숟갈 몇 국자 몇 컵 그런 게 어디 있냐. 그냥 눈대중으로 요래요래 조래조래 하는 거지’ 하실 텐데... 지금이라도 ‘정확한 계량’을 좀 해달라고 엄마를 성가시게 좀 해야 할런가 보다.



찍어놓은 사진을 찾지 못해 AI의 힘을 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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