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우도 그렇고 게도 그렇고 갑각류 너무 귀찮아. 들인 공에 비하면 진짜 알맹이는 요만해. 그래도 맛은 있어. - 그러게. 생각해 보니까 이 귀찮은 걸 해준 사람이 할아버지 밖에 없었네. - 껍질 까주는 게 진짜 보통일이 아니야. 웬만큼의 애정이 있지 않고는 진짜 못할 짓이라니까.
홍두식한테 홍게살을 발라주던 윤혜진이 말했다.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10화)' 얘기다.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
5월의 어느 날. 꽃게가 제철이라고 식탁 옆 제철음식달력이 말해주었다. 이 달력은 제철음식을 잘 알기 위해 샀다기 보단 그냥 예뻐서 산 건데, 가끔 아이들이 이 달력을 들여다보곤 이거 먹고 싶다, 이거 살 수 있냐 이야기한다. 달력을 보던 아들이 꽃게탕이 먹고 싶다고 하는데 하... 꽃게탕은 언제나 망설여진다. 발라 먹는 거 정말 싫은데 살 발라줘야 할 애들이 너무 많아요... 거기다 손이며 식탁이며 찐하게 베는 냄새는 또 어떻고!
그런데 된장 꽃게탕, 포기하기가 어렵다. 이건 그냥 대충 막 끓여도 맛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다.(솔직히 ‘내가 먹고 싶기 때문’이 더 컸다!) 주부로 산지 10년이 넘었고 이런 브런치북을 쓰면서 되게 요리고수인 척하고 있지만 사실 난 살아있는 꽃게 손질도 못하는 쪼렙일 뿐... 싱싱한 제철암꽃게를 제철음식달력에서 보곤, 다 손질해서 ‘꽝꽝’ 얼려놓은 꽃게팩을 사 왔다.(아무렴 어때?)
된장을 베이스로 풀고 고추장, 고춧가루, 소금과 액젓, 거기다 무 잔뜩. 그것만으로 칼칼하고 시원하고 철 되면 생각나는 맛을 내는 걸 보니 꽃게 자체의 육수 뽑는 능력치가 보통이 아닌 것 같다.
우리집 어린이들은 입맛이 까다롭기 때문에 걔네들만 잘 먹어줘도 그날 요리는 선방이라 볼 수 있다.꽃게탕도 선방이었다. 꽃게 냄새가 좋다, 매운데 맛있다 등등 좋은 평이 들려오는 걸 보니 일단은 안심이지만, 셰프는 곧 난관에 봉착한다.
"엄마, 이거 어떻게 발라 먹어야 할지 모르겠어."
올 것이 왔다. 대충 젓가락으로 슥슥 발라보라고 했지만, 역시나 입에 들어가는 것보다 딱지 안에 남아있는 살이 더 많아 보인다. 어쩌겠나. "엄마, 맛없어서 못 먹겠어!"도 아니고 입 짧은 자식들이 먹겠다는데!너무 맛있다는데 게살 발라주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지...(가 아니고 아닌 게 아니고 꽃게 아닌 게...) 막내가 자긴 꽃게 주지 말라고, 국물만 적셔서 김 싸 먹겠다고 한 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다행에 아주 조금 더 가까웠던 거 같다.
"살만 먹으면 또 별로야. 이건 국물에 살을 다 발라놓고 푹 익은 무랑 흐물흐물하게 말은 듯 비빈 듯 밥이랑 같이 떠먹어야 맛있어."
애들한테 설명해 주면서 밥을 말고 있는데 맞은편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불혹을 넘긴 남편. 그는 가시 바르는 게 귀찮아서 생선을 싫어한다. 꽃게라고 다를까. 어쨌거나 그는 맘먹고 작업하면 나보다 꼼꼼해서 가시 하나 없이 생선살을 잘 바르는 편인데, 그날은 거의 애들 수준으로 꽃게를 못 발라 먹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못'이 아니고 드라마 속 홍두식처럼 '안'이었겠지만!
애들 게살 발라주느라 바빠 죽겠는데 "도저히 귀찮아서 못 발라먹겠다. 근데 너무 맛있어..."라며 열심히 국물이랑 야채만 퍼먹고 있는 이 남자를쏴버릴까 잠깐 생각했지만, 맛있게 먹는 것만도 고맙고 얼마나 배가 고프면 저렇게 후룩 해치울까 싶어, 옜다 까짓 거 너도 내가 발라주마 하고 큰 덩어리를 들어 게살을 긁고 긁어 남편 국그릇에 놔주었다.
갑각류로 느끼는 애정의 크기라니. 연애 시절 토마토 해물스파게티를 먹을 때마다 나한테 새우를 까서 놔주던 구남친(좀전에 쏠까 말까 했던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너도 나를 많이 좋아했구나.(물론 극T인 내 친구는 '솔직히 새우는 까줄만 해. 꽃게만이 찐사랑이야.' 라고 했지만 난 새우도 사랑이라 믿는다...?) 그래, 좋은 연애였다. 물론 지금도 조...좋은 인생이다. '나만 주지 말고 너도 좀 먹어', '엄마도 얼른 먹어야지' 라고들 해주니 좋은 인생 맞지. 희생의 아이콘 어머니상은 아니지만, 가정 전담 셰프로 너네들이 맛있게만 먹어준다면 충분해!
하루가 지나도 손가락에서 꽃게 냄새가 사라지지 않는다. 애정이니 사랑이니 뭐니 하고 있지만 사실 또 꽃게살 발라줄 생각을 하면 어쩐지 생각만으로도 귀찮아져서 제철이니 안제철이니 당분간 꽃게탕은 하고 싶지 않다. 그렇긴 한데...멸치와 보리새우와 황태만으로는 안 되는, 오직 꽃게만이 낼 수 있는 맛이 있어서 귀찮음을 감수하고 수꽃게가 제철이라는 가을쯤 한 번 더 끓여 먹게 될지도 모르겠다.
가성비 안 좋은 갑각류. 너 큰 살 한 점 더 주려고, 내가 조금 더 번거로워질 수밖에 없는 갑각류. 사랑은 갑각류를 타고 오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