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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길들이기> 속 에겐남은 약하지 않았다

친절과 다정은 약함이 아니다

by 아드리셋


MBTI의 시대가 저물고 테토와 에겐의 시대가 왔다. 어쩌면 이것도 벌써 저물었을지 모른다. 요즘은 워낙에 뜨고 지고가 빠른 시대라.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의 테토. 여성호르몬 에스트로겐의 에겐. 이름에서 대충 눈치챌 수 있듯이 앞에 테토가 붙으면 좀 더 실행력이나 에너지가 넘치고 주변을 리드하며 파워풀하게 밀고 나가는 성향, 앞에 에겐이 붙으면 좀 더 섬세하게 주변의 감정을 잘 읽고 차분하고 조용하게 분위기를 맞춰가는 성향. 대충 이런 느낌이다. 테토녀, 테토남, 에겐녀, 에겐남. 그냥 mbti처럼 성향을 좀 구분지어보는 것일 뿐 당연히 어느 게 더 낫고 나쁘고는 없다.

아이들과 영화관에서 <드래곤 길들이기> 실사판을 보고 온 어느 날.

영화엔 요즘말로 '에겐남'이 한 명 나오다. 히컵. 주인공이다. 서로를 적으로 생각하고 공격하는 드래곤들과 바이킹족. 드래곤을 잡아서 죽이고 드래곤의 기지를 점령하는 게 제1목표인 테토의 민족 바이킹. 족장의 용맹무쌍함을 하나도 닮지 않은 족장의 아들 히컵은 마을에서 겁쟁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다. 그런 히컵은 특유의 섬세함과 배려심으로 드래곤 투슬리스와 누구도 상상하지 못 한 일대일의 관계를 맺게 된다. 히컵과 투슬리스가 서로에 대해 자세히 알아가게 되고 진짜 친구가 되면서 (그걸 뜯어말리려는 바이킹족의 방해로 난관은 좀 있었지만) 결국 모두가 오해를 풀고 전투를 멈추게 된다. 드래곤과 인간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마을을 만든 것은 겁쟁이라고 나약하다고 놀림받던 히컵이었다.






영화의 여자주인공이 히컵한테 말했다.

"넌 다른 사람이 갖지 않은 걸 가졌어!"


드래곤 길들이기 공식 스틸컷



다른 사람이 갖지 않은 것에 대해 생각했다.

친절과 배려와 섬세함과 다정함 같은 건 이제 정말 희귀한 능력이 되어버렸다. 좀 더 거칠기 쉽고 서열 세우기 쉬운 문화 속의 남자들에겐 더욱 그렇다. 어렸을 때부터 우린 자주 그렇게 들어왔다. 남자다움은 이런 거고 여자다움은 이런 거고. 그래서 센 거, 용감한 거, 강한 거, 테토스러운 것들만이 남자다운 거고 그게 미덕이라고 여겨지는 분위기가 있는데 그게 능사가 아니란 걸 모르는 사람 없었으면.....


부드럽고 여리고 다정한 남자는 약한 거고(반대로 여자들은 이런 자질이 필수가 되어야 한다고 들어와서 그것도 문제다), 그렇게 살면 남에게 쉽게 무시당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살다 보면 그게 아닌 경우가 많고 이제는 정말 아니어야 한다. 약함으로 취급되는 부분들이 진짜 능력이다. 배려하는 사람, 친절한 사람, 섬세하게 돌보는 사람. 남자에게 약간의 놀림의 수식어로 붙는 에겐스러움. 희귀하다. 소중하다.



며칠 전 <냉장고를 부탁해>를 보다가 육성으로 '어머...'라고 두 번 말했다. 요리 때문은 아니었고 말을 너무 예쁘게 하는 남자들 때문이었다. 한 명은 아이돌 J, 한 명은 셰프 S였다.


거 참 참하게 생긴 친구가 말도 예쁘게 하네. 홍보할 게 있냐고 묻는 엠씨들 말에 J가, 전역도 했고 곧 솔로도 나와서 겸사겸사 알리고 싶어 나왔다는 말을 수줍게 하는데 말투에 표정에 선함이 뚝뚝 묻어난다. 단지 인상이 세지 않고 부드럽게 생겨서 그런 걸까? 잘은 모르겠지만.


특이하게 만들어진 요리를 칭찬하는 셰프 S는 또 어떻고. 요리과정만 보면 저게 맛있겠나 싶었던 요리여서 다들 의아해하고 있는 와중. 맛의 합이 좋고 머리로는 분명 아닌데 가슴이 자꾸 맛있다고 한다면서 반달눈을 하고 웃는데 엠씨가 그때 딱 내 심정을 대변해 줬다.

"말을 어쩜 저렇게 예쁘게 하실까."


물론 나는 그들을 다 모르고 사석에선 방송과 다르게 아무 말, 막말, 거친 말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호감을 사는 눈빛, 말투, 태도, 단어... 억지로 이미지 관리 한다고 갑자기 되지는 않는 것들이라고 믿고 싶다. 내가 본 그 순간만큼은, 우리 아들들도 저렇게 상냥하게 말하는 남자로 크면 좋겠네, 싶었다.

말이 꼭 단어 선택만 잘한다고 예쁘게 되는 건 아니니까. 다른 사람을 향한 배려, 자신을 향한 겸손, 침착함과 차분함, 적당한 사회성... 여러 가지가 태도가 합해져서 말로 드러나는 거니까.



영화랑 예능 이야기 하다가 우리 아들들 잘 컸으면 좋겠다로 끝나는 밤.

그러려면 집에서 엄마의 예쁜 말과 상냥한 말투를 자주 듣고 자라야 할 텐데.....

엄마가 미안하다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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