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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드리셋 Jul 25. 2019

둘째가 슬퍼했던 이유(feat.여우와 포도밭)

심리상담은 먼 곳에 있는 게 아니었다


"엄마, 책 못 읽어주면 재밌는 이야기 해 줘."
"그래, 알았어. 옛날 옛날에...."

"호랑이가 살았어요 라고 해~"
"아니야, 다른 거 할 거야. 옛날 옛날에... 여우 한 마리가 살았어요."

그렇게 이야기는 시작됐다.



"여우는 밤마다 근처에 있는 포도밭에 몰래 들어가 포도를 따 먹었어요.
포도밭을 가꾸는 농부 아저씨는 화가 났지요.
'누가 매일 밤 내 포도를 훔쳐 먹는 거야!'
농부 아저씨는 포도밭 주변에 울타리를 촘촘하게 치고, 자기가 쪼그려 앉아 들어갈 수 있을 만큼의 구멍만 남겨놨어요.
그날 밤, 여우는 그 구멍으로 들어와 또다시 포도를 몰래 따먹었어요.
'아, 배부르다!'
포도를 잔뜩 따먹은 여우는 배가 불렀고, 배는 어느덧 풍선만큼 커져있었지요.
집으로 돌아가려고 울타리를 나서던 여우는 커져버린 배 때문에 그만, 울타리 구멍에 몸이 걸려버리고 말았어요.
그때였어요.
'이 놈! 니가 내 포도를 매일 몰래 따먹고 있었구나! 혼을 내줘야겠어!'
울타리 밖에서 몰래 포도밭을 지켜보던 농부 아저씨가 나타난 거예요!
여우가 말했어요.
'잘못했어요 아저씨~ 다시는 포도를 훔쳐먹지 않을 게요!'
농부 아저씨는 여우에게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말했고, 여우를 집으로 돌려보내 줬어요.
집으로 돌아간 여우는 나쁜 일을 하지 않고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끝~"


"정말 슬픈 이야기다."
"이게 슬펐어? 왜 슬펐어?"

"여우가 혼났잖아."
"여우가 먼저 농부의 포도를 훔쳐먹었잖아~"

"그래도 혼났잖아."
"아저씨가 열심히 농사지은 포도를 매일 몰래 먹었으니 혼나야 하지 않을까?"

"잘못했다고 말했잖아."
"그래서 아저씨가 조금만 혼내고 집으로 돌려보내 준 거잖아. 잘못했다고 안 했으면 더 혼났을 걸?"

"나는 여우가 걱정돼."
"그렇구나. 지누는 그래서 슬펐구나. 엄마는 여우가 먼저 아저씨의 포도를 따먹어서 아저씨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는데..."

"여우가 다음에 또 혼나면 어떡하지?"
"아니야, 다음부턴 안 그럴 거니까 혼날 일 없어."

"그래도 혼나면 어떡하지?"
"아니야, 포도가 먹고 싶으면 '아저씨, 저 포도 하나만 주시면 안 돼요?' 하고 물어볼 거야. 그럼 안 혼나."

"그래도...."
"응 그만. 여우는 이제 행복할 거야. 우리도 이만 행복하게 자자? 응? 응??!!"



우리는 이토록 치열하게 자신의 입장에서 '여우'와 '농부'를 변호했다. 원작하고 똑같지도 않은 이 이야기 한 편이 뭐라고 감정을 다 갖다 부은 우리 둘.


"동생을 때리거나 형한테 물건을 던져서 혼이 나도, 자기가 잘못한 것보다는 자기가 혼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만 집중해 늘 억울하고 속상한 둘째의 심리상태를 엿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혼나는 게 진절머리 나도록 싫은 감정도 잘 드러나고요. 아이는 잘못했다고 말하면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진심이든 아니든 자기가 잘못했다고 말한 후에도 엄마 아빠가 화난 표정을 하고 있다거나, 넌 맨날 잘못했다고 말만 하지!라고 하면 아이 입장에선 굉장히 이해가 안 가고 속상할 수 있는 거죠."

(상담 선생님 빙의) 머리맡 이야기를 통한 생생한 심리검사의 현장이다!!
입이 심하게 헐어 책을 읽어주기 힘들 것 같아 그냥 누워서 이야기만 해주고 자기로 했는데, 어쩐지 책 보다 더 긴 대화를 한 것만 같은 느낌이네?



좀 덜 혼내고 소리 덜 지르고 많이 사랑해줘야겠다.(이 와중에 안 혼내겠다는 다짐은 하지 않는 치밀함) 대화를 마무리 짓고 나선 '엄마 입에 생긴 상처 없어지게 해 주세요'라고 예쁘게 기도해주는 아이인데, 매일매일 혼나지 않고 지나가는 하루가 없으니 본인도 얼마나 고달플까...
싶다가도!! 무자비하게 막내를 때리는 모습이 눈에 띄면 가끔 나도 남편도 뚜껑이 열리는 상황이 오고야 만다. 무섭게 말하지 않으면 '엄마 아빠를 호구로 보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내일은 동생 때리거나 물건 던지는 거 빼고는 웬만하면 참고 혼내지 말자고 마음먹어 본다.(모든 걸 다 참겠다고는 하지 않는 치밀함2. 애미가 자신의 한계를 잘 파악하고 있음)


동화가 좀 와전된 경향이 있지만, 그래도 나한텐 꽤 의미 있는 마음 나눔의 시간이었다. 잘못하면 꼭 혼나야 하는가, 자식은 반드시 부모의 말을 들어야 하는가, 혼을 내는 주체는 누구인가, 그 둘의 관계는 늘 수직적인가 하는 한 번쯤 생각해 볼만한 근본적인 질문을 남기며 모쪼록 내일은 입이 다 나아서 책을 읽어줄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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