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녀인 내가 과학과 사랑에 빠진 이유
하늘이 더없이 높아만 가는 계절이다. 푸르른 하늘을 위에 두고 한강변에 누워 본다. 선선한 바람을 맞고 있으려니 온갖 고민이 다 날아가는 기분이다. 새삼 나의 존재가 그렇게 작아 보일 수 없고, 이 작은 우리들이 모여 살고 있는 이 세상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다.
페일 블루 닷(Pale Blue Dot, 창백하고 푸른 점-지구)을 기억하는 분이 있을 지 모르겠다. 세계적인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지은 책의 이름이다. 1977년 9월 목성과 토성을 조사하려는 목적으로 지구를 떠났던 우주탐사선 보이저 1호는 명왕성의 궤도로 넘어가기 직전 지구 방향으로 카메라를 돌렸다. 지구를 떠난 지 약 23년이 지난 후였다. 지구로부터 61억 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찍어낸 60개의 스냅사진 속에는 놀랍게도 지구가 있었다. 창백하고 푸른 아주 작은 점. 그게 지구였다. 여기에 감명을 받아 책까지 펴낸 칼 세이건은 1994년 코넬대 대학 강단에 올라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모든 역사, 전쟁, 사랑, 그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이야기들이 모두 이 작은 점 속에서 펼쳐졌다’고. 하늘과 비교해도 이렇게 나약한 인간인데, 내가 살고 있는 지구가 우주에선 하나의 ‘점’일 뿐이라니.
학창 시절부터 공부하라면 영어와 국어 책만 펴 놓던 나는 전형적인 ‘문과녀’였다. 그런 내가 하늘을 바라보며 ‘페일 블루 닷’을 떠올리다니. 2년 째 진행하고 있는 과학 생방송 ‘곽방tv’가 아니었다면 아마 평생 생각조차 못했을 주제가 아닐까 싶다. 과학의 대중화를 꿈꾸며 젊은 과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곽방tv는 천문학, 양자 역학, 물리학 등 기초 과학 뿐 아니라 골프, 드라마, 미세먼지 등 일상 속 다양한 주제들을 과학과 연결 지어 생각해보는 방송이다. 방송을 시작하기 전까지 지루한 ‘학문’에 불과했던 과학은 이제 내게는 하나의 ‘문화’ 그리고 ‘삶 그 자체’다.
사실 조금만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작년 초, 국내 유명 검색 포털 사이트에 ‘중력파’가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르내린 적이 있다. 아인슈타인이 존재만을 말했던 ‘중력파’가 검출됐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중력파는 쉽게 말해 ‘시공간을 일그러지게 만드는 힘’이다. 그리고 이 시공간의 일그러짐은 아주 무거운 어떤 힘이 우주에 가해져 그 힘의 파동이 빛의 속도로 사방으로 전달되며 만들어진다. 물에 돌을 던지면 물결이 퍼져 나가는 것은 누구나 보았을 것이다. 우주라는 물에 ‘돌’ 곧 중력을 가하면 물결처럼 파동치며 시공간이 움직이는 것. 아무도 보지 못해서 감히 상상조차 힘든 그 어마어마한 판타지가 실제로 밝혀졌다는 건 단순한 놀라움 그 이상이다. 이 시공간을 일그러뜨릴 가공할 힘은 두 블랙홀의 충돌 그리고 새 블랙홀의 탄생에서 왔다는 게 정론이기 때문이다.
태양의 크기는 지구의 무려 109배다. 태양보다 각각 29배, 36배나 큰 블랙홀 두 개가 충돌했다는 것, 그리고 이 둘이 충돌하며 태양 질량의 62배가 되는 블랙홀이 만들어졌다는 것, 이 충돌로 인해 발생한 중력파가 빛의 속도로 13억년을 날아오다 지구를 스쳐 지나가다가 관측된 것이 바로 중력파다.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이 이야기가 현실이라면, 우리 인간의 존재란 ‘중력파’란 세 글자가 차마 담아내기 힘든 그 가공할 힘의 우주 속에서, 그 우주 속에 창백하고 푸른 점에 불과한 지구 속에선 또 얼마나 작은 것이란 말인가. 아마 먼지 크기로도 표현하기 힘든 양자 수준의 크기일 것이다.
이 사실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이해하기까지도 쉽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과학과 나의 태생적 ‘다름’을 극복하기가 힘들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제 안다. 어렵다고 해서 과학이 ‘문화’가 될 수 없는 건 아니란 사실을. 어려움으로 따져 보면 이해하기 힘든 미술계의 거장들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미술관을 찾고, 웅장한 악기들의 조화가 만들어내는 고풍스런 클래식을 듣기 위해 음악회를 찾는 것 또한 마찬가지일테니 말이다. 저 광활한 우주와 비교하면 먼지보다 작은 인간이 우주를 탐사하는 데서 오는 경이로움, 사과가 떨어지는 데서도 발견할 수 있는 과학의 법칙의 놀라움은 그 어떤 문화와도 비교하기 힘든 감동을 준다.
과학은 이제 내게 또 하나의 인생이다. 과학을 만나기 전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만났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든 물체 중 가장 지구로부터 멀리 떨어져 여전히 미지의 세계를 활보하는 보이저 1호를 한강에 누워 하늘을 보며 떠올리기도 하고, 창백하고 푸른 점 지구 속의 작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힘들 때는 한숨 고르는 여유를 배우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먼지보다 작은 크기의 내 앞에 펼쳐지는 엄청난 삶의 기적들이 말이다. 창백하고 푸른 작은 점 속의 우리 모두가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어쩌면 우리의 인생은 더욱 더 풍성해질 지도 모를 일이다. 칼 세이건은 그의 유작에서 말했다.
죽는 순간 다시 살아나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고 믿고 싶지만 그것은 헛된 바람일 뿐이라고. 이 세계는 더 없이 아름다우며 크고 깊은 사랑과 선으로 가득한 곳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죽은 이후를 생각하기보다 생이 제공하는 짧지만 강렬한 기회에 매일 감사하는 편이 낫다고. 우리 모두가 창백하고 푸른 작은 점 지구 속에서 사랑과 감사로 가득한 삶을 살기를 바라본다. 과학과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