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 출국심사대의 마법

훌쩍 떠남을 그리워하며

by 신서희


적어도 1년에 두세 번쯤은 들락거렸던 곳이 있다. 바로 인천국제공항.


아침부터 서둘러 공항에 도착한 뒤, 탑승 수속과 함께 짐을 부치고 나면 가벼워진 손만큼이나 마음도 한결 가벼워진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여권과 탑승권을 쥐고 출국심사대를 통과한 순간의 짜릿함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끝없이 이어진 면세점과 그 앞을 지나는 사람들을 보면 마치 영화 트루먼 쇼에서 손을 흔들며 세트장 밖으로 나간 짐 캐리가 된 기분이다.

나에게 공항의 면세구역이란 그런 곳이다. 트루먼 쇼의 세트장과 세트장 밖 또 다른 세상을 연결하는 가상의 무중력 공간 같은 곳. 그곳에서 나는 출국심사대 직전까지의 일상을 내려놓고 새로운 일상으로 가기 위한 무중력의 가벼움을 만끽한다. 고작 출국심사대를 통과했을 뿐인데, 문을 열고 나간 면세구역은 나에게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 같은 일상의 분리를 경험하게 해준다.


여행을 가지 못한지 어느새 1년이 지났다. 코로나가 잠시 잦아들 때면 가끔 하루 이틀 짧은 국내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지만, 비행기를 탄 건 작년 1월이 마지막이었다. 기약 없는 집콕 일상이 이어지면서 처음에는 생각보다 집순이 생활에 잘 적응하는 나 스스로가 대견했다. 나에게 숨겨진 집순이의 자질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고작 몇 달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여행이 간절해졌다. SNS에서 지난 여행의 추억을 만나면 가슴이 저릿해지곤 했다.

틈날 때마다 여행을 다녔을 때는 내가 그렇게까지 여행을 좋아하는 줄 몰랐다. 물론 여행이 즐겁긴 했지만,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또 그 나름의 편안함이 있었기에 여행을 못 가도 괜찮을 줄 알았다. 하지만, 코로나 기간이 길어지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얼마나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여행이 주는 위로와 충전이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 말이다.


신기한 건 여행이 자유로웠던 예전에도 막상 여행을 앞두었을 때는 마음이 쉴새 없이 요동치곤 했다는 사실이다. 항공권을 예매하고 여행 준비를 시작할 무렵에는 마음이 마냥 들뜨지만, 출발일이 다가올수록 오히려 내키지 않는 마음이 점점 커졌다. 바쁘지만 무료하게 반복되는 일상이 갑자기 견딜 만해지고 나른함이 편안해진다. 일상의 틀을 깨는 것에 대한 귀찮음이 점차 커지다가 출발 전날이 되면 가기 싫은 마음은 정점을 찍는다. 짐 싸기도 귀찮아서 빈 캐리어를 펴놓고는 투덜대기 일쑤였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이걸 다 제쳐놓고 여행을 간다니 너무 대책 없는 게 아닐까 자책도 되었다.

그러나 이런 널뛰기 마음은 딱 출국심사대까지였다. 출국심사대를 통과하는 순간, 일상은 거짓말처럼 분리되어 여행 모드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여행을 통해 눈으로 보고 혀끝으로 느끼는 오감의 즐거움을 최대치로 경험할 수 있다는 것도 여행의 큰 매력이지만, 나에게 있어서 여행이 주는 가장 큰 회복력은 일상의 분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곳이 어딘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이라는 게 중요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아닌 아예 새로운 일상이 시작된다는 게 여행이 주는 힘이었다.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나 일상의 소소한 걱정들, 신경 써야 하는 인간관계도 모두 여행과 동시에 유보되었다. 여행지에서는 그저 오늘 어디에 갈까, 뭘 먹을까만 결정하면 충분했다. 만사 귀찮을 땐 그냥 동네 카페에 앉아 몇 시간 동안 오가는 사람들 구경만 하고 있어도 괜찮았다. 꼭 해야 할 일, 꼭 가봐야 할 곳 따위는 없었다.

어디 그뿐일까. 여행지에서는 가족, 직장 동료, 이웃, 친구 등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관계도 유보된다. 그저 지금 나와 함께 여행을 하고 있는 친구와만 마음이 잘 맞으면 그걸로 충분했다(그래서 여행 동행자는 중요하다). 이처럼 짧은 기간이나마 익숙한 일상과 관계를 내려놓고, 낯선 곳에서 새로우면서도 단순한 일상을 산다는 건 굉장한 쉼이자 위로가 되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코로나 시대의 집콕 생활을 비교적 잘 버티면서도 문득문득 여행이 간절해지는 건 여행 그 자체 못지않게 출국심사대를 넘는 순간 느끼는 일상 유보의 해방감이 그리워서일 것이다. 마치 어릴 적 동네에서 하던 얼음 땡 놀이처럼 공항의 출국심사대를 지나는 순간 해야 할 일, 소소한 걱정거리, 인간관계들은 모두 ‘얼음’이 되곤 했으니까.

출국심사대를 통과해 자동문이 열리고 한 발을 내디딜 때의 그 짜릿함, 극한의 자유로움을 언제쯤 다시 경험할 수 있을까.


내가 한가로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에도 현장에서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의료진의 노고에 감사하며, 모두가 자유로이 출국심사대의 얼음 땡 마법을 누릴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만을 기대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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