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을 깔아주는 리더

영화「왕과 사는 남자」로 생각해본 좋은 리더

by 루시아 Lucia

영화가 끝나고 나는

한참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도록.

극장 불이 켜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연출이 완벽해서가 아니었다.

CG가 압도적이어서도 아니었다.

역사가 스포라는 말이 있듯,

결말을 이미 아는 이야기였다.

그런데도 눈물이 났다.


가슴 어딘가가 먹먹했다.

왜인지 한동안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집에 오는 내내,

이 질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모두가 결말을 아는 이야기인데,

어떻게 천만이 넘었을까.


「왕과 사는 남자」를 보는 동안,

연출의 흐름이 조금 어색하다 싶은 순간마다

역사 속에서 살아 나온 것 같은 엄홍도와

마을 사람들이 나를 다시 끌어당겼다.


어설픈 CG의 호랑이에

실망하려는 마음이 들려던 찰나,

"네 이놈, 네가 상대할 사람은 바로 나다"

라고 외치는 이홍위의 기백과 기품에 반해

다시 몰입하게 되었다.

분명 결말을 아는 이야기인데,

혹시라도 이홍위가 살아남아 다시

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홍위의 눈이 감기는 마지막 순간,

마치 이런 결말인 줄 몰랐던 사람처럼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에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아쉬운 점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천만 명이 넘는 관객으로 하여금

이렇게 웃고 울게 만드는 영화라면,

누가 뭐라 해도 명작이 아닐까.


영화를 본 사람들은 말한다.

유해진이 아닌 엄홍도는 상상할 수 없고,

유지태가 아니었다면 한명회가

그토록 무섭지 않았을 거라고.


또 단종을 연기한 박지훈이 아니었다면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그 분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슬퍼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만큼 모든 배우들이 마치

그 시대의 실존인물인 것처럼 보였다.


특히 20대의 젊은 배우 박지훈은

이제 아이돌이 아닌 진정한 배우로,

그것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눈빛을 가진 배우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배우 박지훈이 단종의 눈빛을 하고 있을 때,

나는 그 눈빛에 압도되면서도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배우가 저런 연기를 하고,

그 눈빛이 오롯이 화면에 담기기 위해서는

배우뿐 아니라 촬영 당일의 모든 것이

완벽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단종의 환생이라 불릴 만큼 그가

온전히 그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몰입할 수 있었던 현장의 분위기도

한 몫을 하지 않았을까.


배우들이 이홍위와 엄홍도의 환생처럼

연기할 수 있었던 것도,

스텝들이 그 현장을 사랑했던 것도

결국은 그 공간의 온도가 따뜻하고

인간적이며 행복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때 장항준 감독의 인터뷰 한 마디가 떠올랐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내 현장에서 소리지르지

마라. 그렇게 하고 싶었던 영화를 하고 있는데

왜 우리가 서로 상처를 주면서 해야되냐.”


짧은 문장이었다.

그런데 가슴 깊은 데서부터 뭔가가

건드려지는 느낌이 들었고,

두고두고 많은 생각이 따라왔다.


나는 한때 판을 리딩하는 리더가 되고 싶었다.

회의실 앞에 서서 방향을 제시하고,

결정을 내리고, 팀을 앞에서 끌어가는 사람.

그게 리더의 모습이라고 믿었다.


리더가 강력하게 앞장서야

팀원들이 한 방향으로 달릴 수 있고,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조용히

조금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강력한 리더십이 엄청난 성과를 낼 수는 있어도,

그 과정에서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거나

다른 생각이 있어도 의견을 내지 못하는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영화감독은 리더와 닮은 점이 많다.

어떤 감독들은 배우들에게 어떻게 연기할지를

세세하게 지시하고, 자신이 그리는 것을 담아낸다.

그렇게 해서 성공한 영화도 분명 많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자꾸 이런 생각이 든다.

감독이 모든 것을 본인 생각대로

결정하는 그 현장은, 과연 행복했을까.


감독은 영화에서 직접 연기하지 않는다.

카메라 앞에 서지도 않는다.

그러나 어떤 배우를 그 자리에 세울지 선택하고,

그 배우가 자신 안에 있는 가장 깊은 것을

꺼낼 수 있도록 현장의 온도를 만들 수 있다.

그 온도를 차갑게 할지,

따뜻하게 할지는 결국 감독이 정한다.


배우들의 인터뷰를 보면 장항준 감독은

그토록 하고 싶었던 영화를 만드는 현장이

봄날의 햇살처럼 따뜻하기를 바랐고,

또 그런 현장을 만들었던 것 같다.

배우들이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의견을 낼 수 있도록, 그리고 온전히 몰입해

자신의 최대치를 끌어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런 자유롭고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연기 잘하는 유해진 배우와 박지훈 배우가

서로를 향한 존경과 애정을 담아 진심으로

몰입했기에 이홍위와 엄홍도의

가슴 저미는 케미가 나오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행복했던 현장의 느낌과

따뜻한 온도가 스크린을 넘어 결국

천만 관객의 가슴까지 전달된 것이 아닐까.


천만 관객이 선택한 것은

결국 영화의 완성도만이 아니라

마음을 울리는 감정과 감동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감독이 짜준 판 안에서 감독이 원하는 대로만

움직이는 말처럼 연기해야 했다면, 지금처럼

심금을 울리는 연기가 나오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나도 모든 것을 본인이 정하고 판을 끌어가려는

리더 아래에서 일해본 적이 있다.

그 방향성마저 조직이나 회사가 아니라,

작게든 크게든 본인의 입지와 성공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이었다.


작은 일이라도 잘 되면 공은 본인이 가져가고,

잘못되면 책임은 팀원에게로 돌렸다.

이메일 문구 하나까지도 간섭하고 통제했다.

그러니 사람들은 회의실 문을 열기 전에

마음부터 얼어 붙었다.

잘해도 당연한 일이 되었고,

조금만 삐걱이면 비난이 빨랐다.


일을 잘하고 싶은 마음과 살아남아야 한다는

마음이 뒤섞이기 시작하면,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의 최선을 꺼내지 않는다.

아니, 꺼낼 수가 없다. 실수하지 않는

쪽으로, 눈에 띄지 않는 쪽으로,

조용히 몸을 낮추기 시작한다.

조직 전체가 소리 없이,

그러나 확실하게 작아진다.


스스로 생각하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조차도 그런 조직 안에서는

생각을 할 수도, 몰입할 수도 없었다.


그 차가운 온도와 답답한 공기가

사람을 얼마나 위축시키는지,

얼마나 천천히 사람 안의 불을 꺼뜨리는지.

직접 겪어봤기 때문에 안다. 그래서 장항준

감독의 그 말이 그토록 깊이 박혔던 것 같다.


일을 하는 현장에서 화를 내지 않는 것은

단순히 감정을 참는 일이 아니다.

그건 함께 일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이고,

그들이 자신의 최선을 꺼낼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는 일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두려움

대신 설렘이 먼저 오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이 질문을 자주 던진다.

나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몰입할 수 있는 판을 깔아주고 있는가.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에게 역할을 주고

그리고 그 사람이 스스로를 믿을 수 있도록

먼저 내가 그를 믿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는가.

나중에 “잘했다”는 말을 해주는 것보다

잘할 수 있다는 신뢰를 먼저 건네주었는가.

그리고 모든 것을 내가 직접 해야 한다는

집착을 조용히 내려놓고 있는가.


리더십은 내가 얼마나 빛나느냐가 아니라
내 곁의 사람들이 얼마나 빛나느냐로 드러난다.


나는 조금 늦게 알았다.

그리고 그것을 알고 나서,

일하는 방식이 조금씩 달라졌다.

여전히 잘 안 될 때도 있다.


내가 앞에 나서고 싶은 순간도 있다.

내가 하는 게 빠르겠다, 내가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고

답답함에 목소리가 높아지려 할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질문을 다시 꺼낸다.


나는 지금 혼자서 판을 끌어가려 하고 있는가,

아니면 함께 잘 될 수 있는 판을

깔아주려 하고 있는가.


배우도 스텝도, 감독 자신도

너무나 행복한 현장이었다고 했다.

그 말이 정말 부러웠다.


좋은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보다

그것이 천만 영화가 되었다는 것보다

그 과정이 행복했다는 것이 더 부러웠다.

결과만이 아니라 함께한 그 시간까지

온전히 긍정할 수 있다는 것.


나중에 “그때 참 행복했다”고 돌아볼 수 있는

기억을 함께 만들었다는 것.

과정과 결과가 모두 아름다운,

어쩌면 평생에 한 번 하기 어려운

소중한 경험을 함께한 그분들은

오랫시간 그 시간을 기억할 것이다.


나도 그런 팀 안에서 일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나도 그런 판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강하게 들었다.


혼자서 판을 리딩하는 것보다

다 함께 신명나게 놀 수 있는

판을 깔아주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걸 안다.


빛나지 않아도 되는 자리를 기꺼이 택하는 일이

얼마나 단단한 마음을 필요로 하는지도 안다.

그러나 그 어려운 쪽이

함께하는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하고

나 또한 더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이 질문이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 남았다.


나는 지금 어떤 판 위에 서 있는가.
나는 어떤 판을 만들고 있는가.
그리고 내 곁의 사람들은 그 판 위에서
자신 안의 가장 좋은 모습을 펼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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