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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oungmi Jun 27. 2023

워킹맘의 개기일식

한국인 학교에 보내주세요

아이 둘을 키우는 워킹맘이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생활하기 위해서는 아래의 조건들이 동시에 만족되어야 한다.


첫째 아이가 정서적, 신체적으로 괜찮아야한다.

둘째 아이가 정서적, 신체적으로 괜찮아야한다.

시터 이모님께서 특별한 일이 없고 편안하셔야한다.

회사의 프로젝트 진행상황이 그럭저럭 괜찮아야한다.

하지만 위의 조건들이 모두 괜찮은 경우는 극히 드물다.



마치 개기일식이 일어나는 일처럼



보통은

한 아이 혹은 두 아이가 아프거나

새학기에 바뀐 영어 학원에 아이가 적응을 못해

학원을 다시 알아봐야하거나

시터님께서 갑작스런 일이 생겨 못오시게되거나

회사의 프로젝트가 난항에 빠지거나

갑작스런 보고 일정이 잡힌다.

그래서 위의 문제들을 해결하기위해

대체로 나의 컨디션을 포기한다.


2017년 둘째 아이의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한 어느 여름에는

첫째 아이의 어린이집에서 아이가 놀이터에서 놀다가 팔이 부러져 응급실에 갔다고 연락이 왔고, 그후로 몇일 뒤에 둘째 아이를 봐주시던 풀타임 시터님으로부터 개인적인 사정으로 일을 그만두신다고 연락이왔다. 그리고 입사 후 처음 담당하게된 사용자조사 프로젝트는 실사를 앞두고 있어 미친듯이 바빴고, 외주업체와의 일이 잘 진행되지 않아 프로젝트가 난항에 빠진 상황이었다. 3가지의 문제가 한꺼번에 몰려온 것이다.


출퇴근길에 운전을 하며 펑펑울었던 기억이난다.

아이둘을 키우면서 회사를 다니는 것은 사치인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서글펐다. 입사 후 처음으로 사용자조사 프로젝트를 담당하게되었는데, 나는 실무에대해 궁금한 것이 너무나 많았다.


대학원을 졸업하고나서도 여전히 안개 속에 있는 것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던 UX 라는 업무는, 회사에서 실무를 할때마다 뿌연 안개가 걷힌 맑은 날의 풍경을 보는 것처럼 실체를 알게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2017년, 입사 10년차의 나는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UX 실무들이 너무 궁금해 도저히 회사를 그만둘 수 없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을 하기위해 쏟아부은 그동안의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는 것을 견딜수가 없었다.


울다가 정신을 차리고 여러 개의 시터업체에 전화를 걸어 시터님 면접을 줄줄이 잡았다. 매일저녁 퇴근 후 시터님 면접을 보면서 일주일만에 시터님을 다시 구했다. 그리고 둘째 아이를 아기띠로 안고 시터님과 함께 첫째 아이의 병원을 다니며 시터님과 둘째 아이를 적응시켰다. 그렇게 퇴사의 위기는 무사히 지나갔다. 첫째 아이는 깁스를 풀고 어린이집에 다시 다니게되었고, 둘째 아이는 새로 오신 시터님과 잘 적응을했다. 난항이었던 프로젝트는 회사 동료의 도움을 받아 마지막 보고까지 잘 마무리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을 때
나는 김장철 잘 절여진 배추처럼 피곤에 절여진 상태가 되었다.



그 일이 복직 신고식이었을까.

다행히 그 뒤로는 한번에 1~2 가지의 소소한 일들이 생겼고, 회사를 그럭저럭 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가끔씩은 아이들도 괜찮고, 시터님도 편안하시고, 회사도 바쁘지 않고 그래서 나의 컨디션이 최상인 개기일식 같은 순간들이 아 주 아  주  가   끔    씩 찾아왔다. 그러면 나는 그동안 미뤄놨던 병원을 다니거나, 나를 위해 반차나 연차를 쓰는 호사를 누리기도했다.


 




육아휴직을 하고 캐나다에 오면서 나는 길고 긴 개기일식을 맞이하리라는 기대감에 부풀어있었다. 그런데 캐나다에서도 예외는 아닌듯 했다.


교육청 담당자와 전화통화를 하고난 후, 학과변경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고나서 나의 컬리지 문제는 해결이됬다. 그리고 몇일 뒤, 컬리지 개강일에 맞추어 아이들은 캐나다의 초등학교에 등교를 시작했다. 이제 비로소 정착을 위해 필요한 과정들이 모두 끝났다는 생각에 안도하고있을 때, 아이들이 이틀째 등교하고 돌아온 날,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인해 나는 매우 난감해졌다.


학교에서 돌아온 첫째 아이가 한국인 학교에 보내달라고 펄쩍펄쩍 뛰었다. 둘째 아이의 표정은 해맑았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둘째 아이의 반에는 한국인 여자아이가 있었고 그 아이의 옆자리에 앉게되어 선생님의 말을 잘 못알아들을 때마다 여자아이가 도와주었다고했다.


첫째 아이의 반에는 한국인 친구가 없었고, 첫째 아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온통 외국인으로 가득한 공간에 혼자 남겨진 셈이었다. 등교 둘째날은 하필이면 한학기에 3번 계획되어있는 수영수업이 있던 날이었고, 등교 둘째 날이었던터라 첫째 아이네 반의 수영수업에 대해 학교로부터 사전에 안내를 받지 못한 상태였다. 반 친구들은 모두 수영수업에 가고 첫째 아이만 다른 반에 잠시 맡겨져 점심시간을 간식시간으로 착각해 도시락도 먹지 못하고, 낯선 곳에서 어리둥절해하며 자신이 알 수 없는 곳으로 보내졌다는 불안함으로 몇시간을 보낸 것이었다.


한국인 학교에 보내달라는 말을 들은 순간, 머릿속에서 '띵' 하고 종소리가 울리는 느낌이었다.




내가 아이의 입장에서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구나

아이에게 좋은 기회를 주고 싶은 마음만 앞섰지

정작 내 자신이 그런 경험이 없었으니

어린나이에 영어로 의사소통이 자유롭지 않을 때

온통 외국인들에 둘러쌓여진 상황이

얼마나 황당했을까

말한마디 안통하는 곳에서

얼마나 불안하고 답답했을까




어학연수 시절 한국 유학생들을 피해다니느라 고생한 기억때문에 한인 타운을 피해 이곳으로 왔는데, 아이의 정서에는 한인 타운으로 가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을까, 작은 카톨릭 학교가 가족적인 분위기라 좋을 것 같았는데 규모가 큰 공립학교로 갔으면 같은 학년에 한국학생이 한명이라도 있지않았을까, 여러가지 생각들이 밀려왔다. 첫째 아이의 담임 선생님께 장문의 이메일을 보냈다. 아이가 그날겪었던 일과 그로인해 당황스러웠던 감정들, 그리고 앞으로 학교에서 어떻게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는지, 선생님과 직접 만나서 상담을 하고 싶다고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컬리지 수업 도중에 일찍 나와서 첫째 아이가 하교하는 시간에 맞추어 학교에갔다. 남편은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출발하고, 나는 첫째의 담임 선생님과 긴 면담을 하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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