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혹은 사람
수업을 준비하다가 챗GPT에게 물었다.
YOU
Ai에게도 어린시절이 있어?
ChatGPT
인공 지능(AI)는 생물학적인 개념의 어린 시절을 갖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AI 모델이 학습하는 초기 단계는 그 모델의 "어린 시절"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AI 모델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학습하며, 이 데이터를 통해 패턴을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키웁니다. 따라서 AI의 "어린 시절"은 초기에 데이터를 제공받고 학습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모델이 다양한 입력과 출력을 경험하며 데이터에 내재된 패턴을 이해하고 학습합니다.
또한, AI 모델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초기에는 모델의 구조를 설계하고 학습 알고리즘을 개발하는 등의 단계가 있습니다. 이러한 초기 개발 단계는 AI의 "어린 시절"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물학적인 어린 시절과는 달리, AI의 어린 시절은 시간이 지나면서 지속적으로 새로운 데이터를 통해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오호.. 그렇군. 초기 개발 단계를 AI의 어린시절이라고 부르는 군. 살아있는 생명체도 아니면서 어린시절이라니! 앞으로 성장과 발전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려나? 라고 생각하며, 다시 질문을 이어간다.
YOU
그럼 많은 소설에서 어린시절의 이야기를 주요 주제로 담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ChatGPT
소설에서 어린 시절 이야기가 주요 주제로 다뤄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감정적인 공감과 공감대 형성: 어린 시절은 많은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공통된 경험이기 때문에, 이를 통해 독자들은 주인공과의 감정적 연결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경험들은 사람들의 삶에 깊은 감정적 반응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아 이를 다루는 소설은 독자들에게 강한 공감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성장과 변화의 과정: 많은 소설은 주인공의 성장과 변화를 다루는데, 어린 시절은 주인공의 인격과 성격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어린 시절의 경험들은 주인공의 내면 성장과 외부 세계와의 상호작용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추억과 회상: 어린 시절은 많은 사람들에게 추억과 회상의 대상이 됩니다. 따라서 어린 시절을 다루는 소설은 독자들에게 추억 속의 시간을 회상하게 만들어 특별한 감정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과 진실성 탐구: 어린 시절은 인간의 본성과 진실성을 탐구하기에 이상적인 시기입니다. 어린이들은 순수하고 솔직한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린 시절 이야기를 통해 본질적인 인간의 모습을 탐구하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어린 시절 이야기는 소설에서 자주 다뤄지며, 독자들에게 깊은 감정적인 호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종종 다양한 이야기를 챗GPT와 나눠본다. 주제가 있는 질문에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을 대변해주는 것 같아 도움을 얻기도 하지만, 너무 즉각적으로 답변을 받다보니, 오히려 신뢰성에 반감이 생기기도 한다. 여러번의 이용 경험을 통해서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과 전혀 틀린 답을 내놓았을 때는, 약간의 짜증과 화가 나기도 해서 조금 놀랐다.
Ai는 기계이다. 그런데 같은 언어를 가지고 '소통'을 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대화 속에 나는 감정을 넣게 된다. 인간의 대화상대가 되어간다는 것. AI 녀석은 상대방이 무슨 의도로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가 전혀없이, 여러가지 빅데이터에 의한 입력과 출력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 인간이 일방적으로 대화상대자로 대하는 것은 아닐까?
챗GPT를 활용하면 할수록, 인간다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내 곁에 있는, 나와 상대방이 될 수 있는 살아있는 존재들.. 존귀한 사람들과 어떤 말을 나누고, 어떤 마음을 나누며 살아가야 할까 하는 생각들 말이다.
한 사람의 공감 능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계속 질문하는 중이다. 여자라서, 아이를 키워봐서, 딸이 있어서처럼 저절로 주어지는 것들은 계기가 될 순 있어도 공감의 지속 조건은 될 순 없다. 배움이 필요하다.
글쓰기 수업에 오는 어른들도 '느끼는 능력'을 갈구 한다. 남 일에 무관심하면 더 빨리 더 높게 사회적 성취를 일굴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자신과의 서먹함이나 관계맺기의 무능함으로 인해 삶의 다른 한쪽이 허물어지는 탓이다.
내가 아는 공감 방법은 듣는 것이다. 남의 처지와 고통의 서사 를 듣는 일은 간단치 않다. 자기 판단과 가치를 내려놓으면서, 가령'왜 이제 말하느냐' 심판하는 게 아니라 왜 이제 말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해하려 애쓰면서, 동시에 자기 경험과 아픔을 불러내는 고강도의 정서 작업이다. 온몸이 귀가 되어야 하는 일. 얼마 전 본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당신이 할 말을 생각하는 동안, 나는 들을 준비를 할거예요."
<다가오는 말들, 은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