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누군가에게 미친년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최근에 3번의 영화를 봤다, 정확히는 한 편의 영화를 두 번 연달아 본 뒤 그 영화에 나오는 ‘영화 속의 영화’를 한번 본 것으로,
바로 500일의 썸머 (500 days of summer, 2010)와 졸업 (The graduate, 1988)이다.
500일의 썸머는 스무 살 첫 남자친구가 보고는 너무 감명 깊었다며 추천해 준 게 시작이었다.
당시 감상으로는 조금은 과격한 표현이지만 썸머는 미친년인가? 폴은 뭐 이해는 가는데 좀 찌질하네 - 정도였던 것 같으나, 감성이 넘쳤던 당시의 남자친구는 싸이월드에 비장하게 ‘바보 폴, 어떻게 해서든 썸머를 붙잡았어야지…’라고 단발의 평론을 남겨놓았다.
심리학적으로 우리는 내면의 깊은 곳을 건드리는 사람에 대해 더 격하게 반응한다고 한다. 그것이 공감이든 질투든 분노든 말이다. 나의 두 캐릭터에 대한 평가는 썸머든 폴이든 둘 다 크게 공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나, 지금 생각해 보면 사실은 썸머의 캐릭터가 내 안의 어떤 부분을 건드렸을 수도 있겠다 싶다. 그건 ‘좀 찌질하네’ 와 ‘미친년’ 반응의 차이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겠다.
십여 년이 흐른 지금 나는 폴의 미숙함과 썸머의 외로움에 대해 더 공감할 수 있게 되었으나, 이 영화를 두 번이나 연달아 보게 만드는 것은, 폴의 미숙함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이 아니라 썸머의 외로움에 이끌렸기 때문이다. 연달아 본 두 번째 회차에서는 나는 썸머에 대한 공감을 넘어, 많은 부분을 나와 동일시하게 되었다. 그렇다, 그러니까, 십여 년간 나도 누군가에게 미친년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 영화의 많은 리뷰에서 톰은 ‘미숙했다’, 그러나 썸머는 ‘말하지 않았다’고 표현한다. 이 영화가 철저히 폴의 입장에서 진행되는 것도 이유지만, 썸머가 말 그대로 자신의 속을 톰에게 말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녀가 유일하게 명확하게 말했던 것은 ‘사랑을 믿지 않는다‘ 하나였으니.
다만 썸머는 영화 내내 행동으로는 톰에게 애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그의 꿈을 격려하며, 그의 취향을 궁금해하고, 아무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를 그에게만 털어놓는다. 그러나 톰은 그러지 않는다. 톰의 시선에서 진행되는 이 영화에서 우리는 ‘썸머의 무엇’을 알 수 있었나. 그녀가 링고스타를 좋아한다는 단 한 가지의 작은 취향 (그 마저도 톰은 무시하지만) 말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녀의 꿈은 무엇인지, 비서일을 그만두고 어떤 것을 하고 있는지,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오죽하면 많은 관람자들이 썸머를 비난하자, 톰 역할을 했던 배우 조셉 고든 래빗이 이런 말을 인터뷰에서 하지 않았나.
“저는 톰이 더 잘못했다고 생각해요, 톰은 썸머에게 질문하지 않았어요.“
질문을 하지 않은 사람이 나쁜가, 먼저 말하지 않은 사람이 나쁜가. 이런 잣대로 ‘누가 더 잘못했는가’를 들이민다면 각자의 답을 찾을 수도 있을지 모르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런 단편적인 것이 아니다. 다만 ‘먼저 말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을 뿐이라 말하고 싶다. 불행하게도 혹은 필연적 이게도, 생각의 깊이가 아주 깊은 곳까지 도달하는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이야기를 들어주지 못했던 혹은 그 깊이를 이해받지 못했던 환경을 많이 마주하게 되면, 깊고 무거운 말들을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으려 한다고.
그러나 사실은 모두가 그렇듯 우리는 남에게 정말 이해받고 싶은 ‘어떤 부분’이 있는 것이다. 톰이 자신의 미숙한 행동에도 ‘순수한 마음’을 이해받고 싶어 했던 것처럼, 썸머는 표면의 말하지 않음에도 ‘깊은 자신의 마음’을 누군가가 궁금해하고 알아주길 바랐다. 그리고 그런 마음은 상대가 나를 이상화해서 바라보는 것이 아닌 나의 본질에 대한 진심 어린 관심 속에서만 터져 나오는 것이다. 썸머의 남편은 ‘썸머가 읽는 책이 무엇인지‘ 질문을 시작으로 그녀에게 다가간다. 그 질문이 단순히 그녀의 취향에 대한 질문이었기 때문에 마음을 연 것이 아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바라보는 어떤 프레임 속의 그녀가 아닌, 그녀라는 사람 자체에 대해 정말로 궁금해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어느 날 아침 알게 된 것이다.
‘이해받았다고’
You never wanted to be anybody’s girlfriend, and now you’re somebody’s wife. I mean, it doesn’t make sense.
“애인도 싫다더니 이젠 유부녀가 됐네. 이해하기 힘들어, 말이 안 되잖아”
It just happened.
“그렇게 됐어”
Right, but that’s what I don’t understand. What just happened?
“그게 이해가 안 돼. 어떻게 된 거야?”
I just woke up one day, and I knew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깨달았어”
Knew what?
“뭐를?”
What I was never sure of with you
“너랑 만날 땐 몰랐던 거”
- 500 days of summer 中
500일의 썸머
마크 웹 Prod.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