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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리어는 작품이 아니라 스케치북이다

[Prologue]

“왜 지금 스케치북인가?”



우리는 오랫동안 ‘완성된 작품’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시대를 살아왔다.
좋은 학교, 좋은 학점, 준비된 자격증, 잘 다듬어진 포트폴리오가 있어야만
비로소 출발선에 설 수 있다고 믿어온 것이다.
스펙이라는 이름의 액자에 넣어 정제된 결과물만이
능력의 증거로 받아들여졌고,
미완성의 흔적이나 시행착오는 감춰야 할 결함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 오래된 문법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학력과 스펙이라는 ‘완성작’이 미래를 보장하지 못하고,
완벽하게 준비된 사람만 출발할 수 있다는 전제는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앞에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실제 경력 현장은 완성보다 “어떻게 만들어가는가”라는
과정의 힘을 더 중요하게 보기 시작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케치북이라는 은유가 중요해진다.
스케치북은 완성된 작품이 아니다.
서툰 선, 실패한 시도, 지운 흔적, 다시 그린 라인까지
‘과정’ 그 자체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그릇이다.
스케치북을 펼치면 그 사람의 손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무엇을 보고 무엇을 고민했는지,
어떤 방식으로 형태를 찾고, 무엇을 고쳐왔는지가 모두 드러난다.


그리고 지금의 커리어는 정확히 그와 같은 성질을 지닌다.
완성된 증명보다 과정의 궤적,
스펙보다 시도와 흔적,
결과보다 생각하고 움직이는 방식이 더 중요한 시대.
커리어는 더 이상 하나의 정제된 작품이 아니라
매일 그려지는 수많은 선과 수정의 흔적,
스케치북에 남겨진 과정의 총합으로 평가받는 시대가 온 것이다.










한국 채용 시장에서 벌어지는 변화의 충격




한국의 채용 시장은 지금 거대한 균열을 지나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발표한 ‘2025년 상반기 채용시장 특징과 시사점 조사’ 결과를 보면

올해 기업 채용 공고의 82%가 경력직이었다.
신입만을 대상으로 한 공고는 고작 2.6%에 불과했다.
대졸 취업준비생이 “아예 출발선에 설 기회조차 없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거에는 ‘준비만 하면 출발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면,
지금은 ‘준비해도 출발선 자체가 보이지 않는’ 시대가 된 것이다.


기업들은 더 이상 ‘가능성 있는 인재’를 뽑아 키우지 않는다.
대신 즉시 투입 가능한 사람,
오늘 들어와도 내일 바로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을 원한다.
기업 내 교육·훈련 기능이 축소되면서
입사 후 성장하는 구조가 사라지고,
‘이미 완성된 사람’만 통과시키는 방식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 흐름은 신입뿐 아니라 직무 전환을 꿈꾸는 청년과 실무자에게도
매우 가혹한 진입장벽이 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 구조 속에서 대학 졸업장이 더 이상 입장권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때는 ‘대졸’이라는 타이틀만으로
적어도 면접의 문 앞까지는 갈 수 있었지만,
이제 학력이나 자격증만으로는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지,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를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경력’이라는 증거가 없으면
개인의 잠재력조차 온전히 평가받기 어려운 시대가 된 것이다.


문제는 이 변화가 단순한 현상이 아니라
“경력 시장의 문법 자체가 바뀌고 있다는 신호”라는 데 있다.
경력 없는 사람은 점점 출발선 밖으로 밀려나고,
새로 시작하려는 사람에게는
아예 문이 열리지 않는 듯 보인다.
이 잔혹해 보이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방식의 커리어 전개법을 찾아야 한다.










AI 이후 인재 평가 기준의 대전환




채용 시장의 변화가 단지 경기 상황 때문만은 아니다.
이 흐름의 근저에는 AI가 바꿔놓은 ‘일의 구조’가 자리한다.
지금까지 인간이 해오던 많은 작업이
AI의 영역으로 빠르게 흡수되고 있다.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일,
문서를 요약하고 정리하는 일,
자료를 정돈하고 초안을 만드는 일,
기본 분석을 수행하는 일—
이 모든 것은 GPT와 같은 생성형 AI가
보다 정확하고 빠르게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인간에게 남은 역할은 완전히 다른 성질을 띠기 시작한다.
무엇이 문제인지 정의하는 능력,
수많은 정보 속에서 의미를 해석하는 능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획을 설계하는 능력,
그리고 여러 사람과 기술을 조율하며
실행의 방향을 바르게 잡는 능력.


AI 시대에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은
더 이상 손으로 하는 기술이 아니라
머리로 문제를 바라보고
가치와 흐름을 결정하는 지점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 변화는 자연스럽게 인재 평가 기준을 바꾸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스펙·학력·자격증 같은 정형화된 “완성물”이
개인의 실력을 상징했다면,
이제 기업이 보려는 것은 단 하나,
“어떤 과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왔는가?”이다.


즉, 평가 기준이
결과 중심에서 작업 방식 중심으로 이동한 것이다.


완성된 제품보다
어떤 스케치와 프로토타입을 거쳐 도달했는지,
기획 초안에서 무엇을 고민했고
실행 과정에서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가
더 중요한 지표가 되었다.


AI 시대의 역설은 여기서 드러난다.
기술은 완성품을 쉽게 만들어주지만,
사람은 그 완성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줘야 한다.


바로 이것이 ‘스케치북 방식’이 시대의 요구와 맞닿는 이유다.
스케치북은 일의 과정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흔적을 남겨왔는지를
가장 정직한 언어로 증명한다.
그리고 지금 기업은 결과가 아니라
그 흔적을 가진 사람을 찾고 있다.










왜 완성작이 아니라 스케치북이 필요한가





그렇다면 왜 지금, 우리는 완성된 작품이 아니라 스케치북을 꺼내야 할까?
그 이유는 단순하다.
스케치북만이 우리가 어떻게 일해왔는지를 가장 정직하게 보여주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스케치북은 결과물이 담지 못하는 모든 흔적을 담는다.
어떤 것을 관찰하며 시작했고,
무엇을 탐색하며 방향을 잡았는지,
문제를 어떻게 정의했고,
어떤 구조로 기획했으며,
실행 과정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마지막에 무엇을 성찰했는지—
이 모든 과정의 잔상들이 스케치북에 남는다.


기업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바로 이 ‘일의 DNA’다.
결과물만으로는 그 DNA를 알 수 없다.
결과물은 완성된 형태일 뿐,
그 안에 숨어 있는 수백 개의 고민, 실패, 수정,
그리고 “왜 이렇게 만들었는가”라는 맥락은 담겨 있지 않다.
스케치북은 그 숨겨진 맥락을 드러내는 유일한 기록이다.


특히 지금은 실패조차 자원이 되는 시대다.
실패의 기록은 단순한 흠이 아니라
문제를 다시 해결하기 위한 근거 데이터가 된다.
지워지는 낙서처럼 보였던 흔적들이
사실은 다음 선의 정확도를 높이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실패를 많이 해본 사람일수록
문제를 더 빨리 파악하고
다음 시도를 더 정교하게 수행한다는 사실이
실제 HR 데이터에서도 반복적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가 있다.
기업은 더 이상 완성된 능력을 가진 사람을 찾지 않는다.
완성된 능력은 오래가지 않는다.
기술이 바뀌고, 도구가 바뀌고, 시장이 바뀌는 속도 앞에서
‘완성’은 순식간에 구식이 된다.


기업이 진짜로 보고 싶은 것은 잠재력이다.
그리고 잠재력은 결과에서 보이지 않는다.
잠재력은 과정에서만 드러난다.


스케치북은 그 잠재력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방식이다.
어떤 문제에 반응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고,
어떤 흐름을 만들며,
실패를 어떻게 다루는지—
이 모든 것이 스케치북에 담긴다.
결과물은 그저 하나의 점이지만,
스케치북은 그 점에 닿기까지의 전체 궤적을 보여준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완성작보다 스케치북이 필요하다.
이 시대는 작품으로 승부하는 시대가 아니라,
어떻게 그려가는가로 증명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한국 청년들이 겪는 위기를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기




지금의 청년들이 겪는 취업 위기를 개인의 능력 부족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구조 그 자체다.
기업이 ‘신입’을 외면하는 것은 신입의 역량이 형편없어서가 아니라,
‘신입이라는 형식 자체’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채용 구조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교육·훈련 기능을 축소하고,
즉시 투입 가능한 인력을 선호하는 흐름 속에서
“경력 없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평가의 대상 밖으로 밀려난다.
이 변화는 능력 있는 청년도 예외 없이 삼켜버린다.
전공이 무엇이든, 자격증을 몇 개 가지고 있든,
결과적으로 ‘증명 가능한 경력의 흔적’이 없다면
출발선조차 보이지 않게 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청년들의 좌절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들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요구하는 ‘정답’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정답은 분명했다.
좋은 대학, 높은 학점, 자격증, 어학 성적,
그리고 잘 정리된 스펙 한 장.
이것만 갖추면 면접의 문 앞까지는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정답들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학력은 실력을 보장하지 않고,
시험 점수는 문제 해결력을 보여주지 못하며,
스펙은 실제 일하는 방식을 설명하지 못한다.
완벽하게 준비한 스펙조차
AI 기반 자동화 흐름 속에서 순간적으로 무기력해진다.


반면 새로운 정답은 완전히 다른 곳에서 나타났다.
작업물, 사고력, 문제 정의 능력, 기획력, 작은 실행의 축적.
즉, 스케치북에 남아 있는 ‘일의 흔적’이
새로운 평가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새로운 정답을 가르치는 사람도,
이를 기준으로 준비해야 하는 청년들도
아직 제대로 익숙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대학도, 교육기관도, 많은 조직도
찍어내는 방식의 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여전히 완성된 스펙을 중심으로 진로를 설명한다.
반면 실제 시장은
과정 중심, 문제 중심, 스케치 중심의 커리어 문법으로 급격히 이동하고 있다.


이 불일치가 청년들의 좌절을 만든다.
문제가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문법이 바뀌었는데 교과서가 바뀌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취업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억지로 스펙을 더 쌓는 노력이 아니라,
새로운 문법을 기반으로 커리어를 다시 쓰는 일이다.











스케치북 기반 커리어의 철학




스케치북 기반 커리어의 핵심은 단 하나의 전환에서 시작된다.
경력은 완성된 작품이 아니라, ‘쌓여가는 흔적’ 그 자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더 이상 한 번의 결과물로 인생을 증명할 수 없고,
한 번의 선택이나 스펙으로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다.
오히려 시대는 한 사람이 남겨온
일관적인 사고 방식,
반복되는 실행 패턴,
성찰의 깊이를 통해
그 사람의 진짜 역량을 판단한다.


이 ‘흔적의 축적’이 바로 스케치북이 가진 철학의 출발점이다.


스케치북은 단순한 기록 노트가 아니다.
나만의 경력 언어 체계라고 불러야 더 정확하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고,
어떤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우선순위로 두며,
어떤 방식으로 사고를 전개하고,
복잡한 문제를 어떤 구조로 풀어내며,
실패나 시행착오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성찰했는지가
겹겹이 남는 일종의 ‘행동 프로필’이다.


그 안에는 나의 전문성이 어떻게 형성되어왔는지,
강점과 약점이 어떤 패턴을 이루는지,
나는 어떤 환경에서 성장하고 어떤 환경에서 정체되는지,
문제를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고
어떤 방식의 솔루션을 선호하는지가 모두 드러난다.


즉, 스케치북은 단순한 작업 기록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 그 자체를 조각해가는 과정이다.
기업이 완성된 스펙보다
작업 방식과 사고의 흐름을 보고자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스케치북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방식으로 일하고 성장하는 사람인지에 대한
가장 구체적이고도 생생한 증거다.


이 철학은 뒤에서 다룰 27화, ‘정체성의 스케치’와 직접 연결된다.
정체성은 거창한 선언이나 이력서 속 문장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작은 관찰 하나,
작은 탐색 하나,
작은 실행과 실패 하나,
그리고 그 위에 쌓이는 성찰의 문장들.
그 조각들이 모여 한 사람의 전문성을 만들고,
그 전문성이 쌓여 커리어라는 유기체가 완성된다.


경력은 한순간에 완성되는 작품이 아니다.
그날그날 그려내는 선들의 겹침,
사고의 변화,
실행의 흔적,
성찰의 반복이 모여 만들어지는
긴 시간의 스케치다.
그리고 바로 그 스케치가
당신의 커리어를 말해주는 가장 강력한 언어가 된다.










“이제는 완성작을 들고 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완성된 작품을 들고 누군가의 문을 두드릴 필요가 없다.
시대는 완성된 증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다음 선을 그려가는 사람인가를 보고 있다.


커리어는 한 번의 선택이나 한 장의 스펙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매일 손에 쥔 작은 선들, 보잘것없는 흔적들,
그 미세한 변화들이 쌓여 어느 날 거대한 궤적을 만든다.


오늘의 작은 관찰 하나가
내일의 방향 감각을 만들고,


작은 탐색 하나가
가능성의 폭을 넓힌다.


작은 실행 하나가
경력의 첫 장면이 되고,


작은 성찰 하나가
다음 선의 정확도를 높인다.


우리는 늘 ‘큰 변화’를 꿈꾸지만,
경력을 바꾸는 힘은 거대한 도약이 아니라
작은 선을 꾸준히 그려가는 지속성에서 나온다.
스케치북을 채우는 것은 특별한 순간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날들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이제 커리어는 더 이상 완성된 증명서가 아니며,
하나의 작품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경력은 스케치북처럼 살아 있는 기록이며,
지속적인 탐색과 수정의 흔적을 통해 성장하는 유기체다.


세상은 더 빠르게 변하고,
직업은 더 빨리 재편되며,
기술은 더 자주 낡아간다.
이 속도 앞에서 살아남는 사람은
가장 완벽한 작품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가장 꾸준히 스케치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이제 질문은 하나만 남는다.

“커리어는 작품이 아니라 스케치북이다.
그리고 당신의 스케치북은 오늘도 새 선을 그릴 준비가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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