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셉수트가 남기고 싶었던 존재의 흔적
방금 전, 나는 라메세움에 있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돌기둥만 남은 그 신전은, 마치 무너진 권력의 잔향처럼 사막 위에 흩어져 있었다. 거대한 파라오 람세스 2세가 자신을 위해 세운 그곳은 한때 위엄을 뽐냈겠지만, 지금은 태양과 바람 앞에 무릎 꿇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 거기서 오래 머물지 못했다. 그곳이 품었던 ‘영원’은 너무 멀게 느껴졌고, 나는 어쩐지 더 조용하고 섬세한 이야기를 찾고 싶었다.
바로 나는 그녀를 만났다. 절벽 아래 세워진 사원. 고요하고 정제된 구조. 태양을 향해 계단처럼 올라가는 돌의 질서.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 앞에 섰을 때, 나는 무언가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나는 남자였다. 여자로 태어났지만, 이 땅을 다스린 신의 그릇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하트셉수트는 파라오였다. 단순히 왕비도, 섭정도 아니었다. 이집트 역사 속 수많은 여성들 중 유일하게, 그리고 정식으로 파라오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여왕은 스스로를 신의 딸이자, 아문의 선택을 받은 통치자로 선포했다. 여성의 육신을 가졌지만, 통치의 언어와 형상은 남성의 껍질을 덧입었다. 왕관, 수염, 홀, 채찍까지. 그녀가 남성 파라오의 모든 외양을 따라 했던 이유는 단순히 시대의 요구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그녀가 원했던 것이 단지 ‘정당성’만은 아니었다고 믿는다. 그것은 왕권을 향한 의지였고, 시대를 건너고자 했던 욕망이었으며, 더 나아가 신전 너머까지 도달하려는 도전이었다.
그녀의 조각상을 처음 마주한 건 두 번째 테라스였다. 높고 단단한 벽면 아래, 그녀는 팔짱을 끼고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손에는 홀과 채찍을 들고, 팔은 가슴 위에서 교차된 오시리스의 자세. 죽은 자의 신의 형상으로 조각된 이 여왕의 모습은, 한편으론 죽음을 넘어선 통치의 의미를 드러내는 듯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나를 사로잡은 건, 그 얼굴에 단단히 붙은 가짜 수염이었다. 그리고 남성 파라오의 전통 복장. 여성의 육체 위에 덧씌운 남성의 상징들은 결코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녀가 그 자리에 설 운명이었던 것처럼.
기둥 사이를 걷다 보니, 그녀의 조각들이 일렬로 줄지어 서 있었다. 어떤 건 눈을 감고, 어떤 건 고개를 돌리고, 또 어떤 건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서로 다른 표정의 조각상들이지만, 모두가 같은 여왕을 닮았다. 나는 그 질서 정연한 행렬 속에서 그녀의 다짐을 읽었다.
“나는 이 신전의 기둥이며, 중심이다.”
그녀는 자신을 기둥으로 삼아, 신전 전체를 관통하는 정신의 축을 만들었다. 여성이 권력을 잡는다는 것은 곧 스스로를 새롭게 구조화해야 한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단지 자리를 대신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기에, 그녀는 스스로를 이 구조의 일부로 만들었다. 그것이 그녀가 살아남는 방식이자, 왕으로 기억되는 길이었다.
그녀는 신전 입구에도 자신의 형상을 세워두었다. 좌우에 똑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두 개의 석상. 마치 거울처럼 마주 보고 있는 이 조각들은 하나의 왕이 아니라, 두 개의 세계를 지키는 문지기 같았다. 현실과 사후의 세계, 인간의 영역과 신의 영역. 그녀는 그 중간에 서 있었다. 이 신전이 단지 사후 세계로 가는 문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무대였음을 증명하듯, 그녀는 그 입구에 스스로를 세웠다.
하트셉수트가 남성의 이미지를 빌렸던 이유는 단순한 전략만은 아니었다. 아마도 그녀는 진심으로 ‘남성’ 파라오가 되기를 원했을지도 모른다. 어린 투트모세 3세를 대신해 섭정의 자리에 올랐을 때, 그녀는 어쩌면 처음엔 임시의 자리를 지키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는 단지 인내로 지켜지는 자리가 아니다. 힘은 점점 뿌리를 내렸고, 아문의 뜻이라 말하며 자신을 신격화한 순간부터, 그녀는 왕이 되었다. 여성으로서의 정체성보다, 왕으로서의 자기 형상이 더욱 중요한 시대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어머니로서의 책임과, 한 여인으로서의 치열한 야망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었다. 욕망은 덧씌운 것이 아니라, 새로이 빚어낸 것이었다. 하트셉수트는 스스로를 위조한 것이 아니라, 재창조한 것이다.
장제전은 독특한 3단 테라스 구조로, 서쪽 절벽을 뒤로하고 웅장하게 펼쳐진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그 계단식 구성이 눈에 띄는데, 이는 이집트 전통 사원 구조에서 벗어난 과감한 설계였다. 그녀는 신전의 입면조차도 기존 왕들의 양식과는 다르게 했다. “여왕에게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신의 뜻에 맞는 것”으로 설계하라는 명령이 건축가 '세넨무트'를 통해 내려졌다고 한다. 단순한 외관이 아니라, 위로 상승해 가는 공간 구성은 신성의 계단이자, 여왕 자신이 신에게 이르는 길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기둥열이 반복되는 내부 회랑에 들어서면, 공간은 갑자기 조용해진다. 빛은 기둥 사이로만 스며들고, 발걸음은 무겁고 조심스러워진다. 정제된 질서와 반복은 단지 건축적 미학이 아니라, 신성한 공간으로 들어섰다는 의식을 심어주는 장치다. 여왕은 이 회랑의 구조 하나하나에 의미를 담았다. ‘질서 속에 권위가 있다’는 메시지,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모든 것은 신의 뜻을 따른다’는 암시.
벽면을 따라 걷다 보면, 문득 멈추게 되는 장면이 있다. 아문과 하토르 여신 앞에 무릎 꿇은 하트셉수트. 그녀의 머리 위로 생명의 상징인 '앙크(☥)'를 들고 있는 신들의 손이 내려오고 있다. 흔히 말하는 ‘축복’의 장면이다. 하지만 이 부조는 단순한 신앙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계약'이다. 여왕은 신에게 무릎을 꿇지만, 그 안에서 신의 뜻과 권한을 '위임받는' 순간이자 장면이다. 그녀는 이 부조를 새기라고 명령하면서도,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나는 그분의 이름으로 통치하고, 그분의 뜻으로 명령한다. 이 벽을 지나가는 모든 이가 알게 하라. 내 피는 신의 숨결에서 왔고, 내 말은 신의 입에서 나왔다고. 내가 무릎 꿇은 것은 나의 충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머리 위에 내려올 그 권위를 위해서였다.”
제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단순한 음식과 꽃, 향을 바친 것이 아니었다. 그 제물들 하나하나에 의미를 담았다. 꿀은 신의 달콤한 은혜를 상징했고, 붉은 포도주는 피와 생명을 나타냈다. 생선과 소고기, 채소와 과일은 그녀가 다스리는 땅의 풍요를 바치는 상징이었고, 향을 피우는 장면은 그녀가 신 앞에 드리는 숨, 즉 ‘자신의 목숨’을 드리는 의식처럼 묘사되었다. 어쩌면 그녀는 이 벽 앞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이렇게 속삭였을지도 모른다.
“나 하트셉수트는 당신의 종입니다. 그러나 이 땅을 위임받은 자이기도 합니다. 내가 여성이라 하여 주저하지 마소서. 나의 입에서 나가는 말이 곧 당신의 뜻이 되기를, 나의 통치가 당신의 통치처럼 견고하기를.”
이 장면은 정치적 장치였지만, 동시에 간절한 기도였다. 그녀는 신 앞에 자신을 낮추었지만, 바로 그 낮춤의 형식 속에 자신의 권력을 조각했다. 경배의 손짓이 곧 지배의 손짓이 되었고, 무릎을 꿇은 여왕은 어느새 신의 형상으로 다시 일어섰다. 하트셉수트는 이 신전에서 매 순간 스스로를 조형했고, 그 석벽 속에 자신을 봉헌했다.
하트셉수트는 신전의 천장부터 땅바닥까지, 그 어떤 틈도 허용하지 않듯 자신의 권위와 신성을 새겨 넣었다. 천장 위로 펼쳐진 별무늬는 하늘의 질서와 신들의 세계를 상징하고, 그 아래 줄지은 우라에우스 코브라들은 왕권을 보호하는 신성한 존재로서의 여왕을 강조한다. 날개 펼친 태양 원반은 라의 힘을 품은 상징이다. 그 아래에는 제의와 왕권이 연결되고, 신들과 여왕 사이의 계약이 새겨진다. 그녀는 단순히 하늘을 장식한 것이 아니라, 신들의 영역을 끌어내려 신전 전체를 하늘과 이어지는 성소로 만든 것이다.
왕은 신께 바쳐야 했다. 그러나 하트셉수트가 준비한 제물은 의례를 넘어선 감정의 언어였다. 정교하게 조각된 포도송이와 무화과, 나일의 물고기와 짐승들, 그리고 잘 손질된 식물과 향료들이 부조 곳곳에 새겨져 있다. 단순한 제물의 나열이 아니라, 풍요와 생명의 순환, 그리고 하늘의 은총을 끌어내기 위한 간절한 기도문이다.
“나의 손으로 바치나이다. 내가 다스릴 이 땅을 위해, 신이여 허락하소서.”
이 부조들은 하트셉수트가 마치 매일 신에게 엎드려 읊었던 기도문의 시각화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 신전은 단지 기도의 공간이 아니라, 선언의 무대였다. 신전 안쪽, 대칭을 이룬 두 여신의 형상이 손을 맞잡고 있는 장면은 하트셉수트의 핵심 메시지를 보여준다. 그녀는 조화를 이루는 존재였다. 두 여신은 마치 서로 다른 세계, 남성과 여성, 신과 인간, 이집트 상하를 상징하듯 서로를 감싸고 있다. 이 장면 속에서 여왕은 그들 사이를 연결하는 자이자, 중재자이자, 창조자였다. 그녀는 새로운 통치의 질서를 선언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새 시대를 엮어냈다.
이 신전의 부조들은 정직하다. 시간이 흘러도 감춰지지 않는 진심이 돌에 새겨져 있다. 붉게 칠해진 언덕 위, 무릎을 꿇고 손을 뻗는 인물이 있다. 그녀는 무언가를 애타게 붙들고 있다. 누군가는 그것을 제물 바치는 장면이라 읽겠지만, 나는 그것을 어떤 절박한 외침처럼 느꼈다. '내가 이 땅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다.'라는 다짐. 한때 여왕이자 어머니였던 그녀는 이제 파라오의 이름으로 세상의 질서를 지키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야 했다. 산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은 결코 굴종이 아니었다.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더욱 높아지려는 전략, 이집트의 피라미드적 사유에 충실한 제의였다.
하지만 하트셉수트는 단지 권력을 원했던 인물이 아니다. 그녀는 ‘존재’ 자체를 지키고 싶어 했던 여왕이었다. 하토르의 얼굴이 조각된 기둥 하나. 그 부드러운 미소 뒤에 숨겨진 것은 여성적 신성과의 연대다. 그녀는 여신의 도움으로 정통성을 얻고 싶었고, 동시에 그 여신의 품에 머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신전 곳곳에는 하토르의 이미지가 반복된다. 권위는 남성의 수염이 아니라, 신의 미소에서 온다는 듯이.
신전 입구에 놓인 스핑크스도 그런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정면을 바라보며 웅크린 채 신전을 지키고 있는 이 조각상은 그녀가 여왕으로서 얼마나 외롭고도 치열했는지를 보여준다. 수많은 적들의 시선, 의심, 그리고 후대의 침묵을 예견하기라도 한 듯, 여왕은 ‘파수꾼’을 세웠다. 세월은 그 손끝을 마모시켰지만, 그 의도만큼은 여전히 강렬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마침내, 천장을 올려다보면 푸른 하늘을 닮은 별무늬가 눈앞을 가득 메운다. 아스라한 빛이 별들 사이로 스며들고,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그녀는 어쩌면 영원을 믿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돌에, 천장에, 계단에, 자신의 존재를 새겨 넣었다.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 누군가 반드시 이 길을 다시 걷고, 이 별을 바라보며 그녀의 이야기를 기억하길 바라면서.
나 역시 그렇게 이 신전을 걸었다. 부서진 기둥 곁을 스치고, 무너진 벽면에 손끝을 얹으며, 과거의 여왕과 조용히 시선을 나눈다. 여왕의 시선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 침묵은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것을 다 말한 뒤의 고요 같았다. 푸른 별무늬 천장을 올려다보며 나는 숨을 고른다. 그녀가 바라보던 하늘, 그녀가 꿈꾸던 내일, 그녀가 지키려 했던 질서를 함께 생각하며.
하트셉수트는 큰소리를 내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돌에 말했고, 건축으로 호흡했다. 그리고 신에게 묵묵히 기도하며, 자기 자신을 새겨 넣었다. 여왕이라는 이름도, 어머니라는 이름도 아닌, 파라오라는 이름으로. 그 이름이 남기 위해 얼마나 많은 침묵을 견뎌야 했는지, 얼마나 많은 권력을 손에 쥐는 대신 두 손을 높이 들고 신 앞에 무릎 꿇었는지를, 이 신전은 조용히 증언하고 있었다.
나는 여왕의 스핑크스 앞에 잠시 멈췄다. 강인한 얼굴과 마주하며, 이 사막을 얼마나 홀로 지켜내고 싶었을지 상상해 본다. 여왕은 단지 왕좌를 원하는 이가 아니었다. 지워질 것을 알기에, 더 선명한 흔적을 남기고 싶었던 존재였다. 자신을 위한 신전을 지었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자기 자신보다 훨씬 큰 이집트였다.
신전을 나서며, 나는 문득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나는, 오늘 한 사람을 기억하게 되었다.’ 그녀는 신화를 믿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오늘, 그녀가 조각한 신화를 믿게 되었다. 하트셉수트. 여성의 이름으로 왕이 된 사람. 말없이 다짐했고, 조용히 남았으며, 결국 세월을 뚫고 나에게 말을 걸어온 이집트의 파라오.
사진: 나그네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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