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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얄리 Oct 22. 2023

제2화. 마침내, o발 o새끼

3년 전 봄 정확히 5월 12일.

남편이 퇴근길에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고

통화기록을 삭제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날은 회식을 한다고 했고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이라며 앞서 내게 전화를 했었다.

평소라면 신경 쓰지 않고 잤을텐데

최근 부쩍 회식이 잦아서 였을까?

그날따라 잠도 오지 않고,

도착시간이 늦어지는 것 같아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11시, 이 밤에 누구와 통화중일까?

11시40분, 아직도 통화 중이라고 했다.

귀가한 남편에게

핸드폰을 보자고 했다.

분명 통화 중이었는데

통화기록이 없다.


그렇게 끔찍한 5월이 시작되었다.


심리상담사 S는 배신감과 분노 수치심에 절어

한 동안 말을 못 잇는 내 곁에서

침묵으로 함께 있어주었다.

약간의 흐느낌과 한참의 침묵 후

허공을 향해 내뱉은 말은

“씨발 개새끼”였다.


아주 오랫동안 억압되어 있던 분노의 에너지가

세상 밖으로 터져 나온 순간이었다.

평생 해오던 낡은 패턴에 균열이 나던 첫 순간이었다.

나중에 안거지만

나는 화가 날 때 ‘말 안하기, 벽치기, 조용히 멀어지기’ 같은

수동 공격적 태도로 살아왔더라.

욕은 고사하고 남한테 화도 잘 안 내고

상처를 받을지언정 상처 줄 주는 모르는

착하고 온화한 사람인 줄로 알고 살았는데,

사실은 화를 품고는 내색하지 않고 싸늘하게 손절하는

냉정하고 무서운 풍모의 사람이었던 거였다.


물론 그 뒤로도 충분히 분노할 수 있기까지는 시간이 한참 걸렸지만.

그날의 거침없는 “씨발 개새끼”는

겉은 땡땡하게 부풀어 올라 있고

안으로는 곪을 대로 곪아

누렇다 못해 푸르댕댕해진 고름같은 분노를

몸 밖으로 짜내는 신호탄 같은 거였다.


동호인 배드민턴은

한 사람이 올코트를 커버해야하는 단식이 아닌

두 사람이 한 팀이 되어 게임하는 복식으로만 진행된다.

동호인이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혼자서 올코트를 커버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단식에서는 수비가 공격 못지않게 중요하지만

복식에서는 공격권을 누가 얼마나 많이 가져가느냐에 따라

승패가 판가름이 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수들의 게임을 보면

기회를 잡은 후

상대의 코트에 내리꽂히는 강력한 공격으로

열 번 스무 번을 쳐서라도 끝을 본다.

공격의 맛!

거세된 내 안의 공격성을 회복하고 싶어서였을까?


“좆같다...(생략)...뭐가 제대로 되어있는 게 없는 것 같다...(생략)...불을 질러라.야. 차라리 불을 질러버리자. 씨발. 다 좆같다.”(황정은 장편소설, 야만적인 앨리스씨(110쪽))


X같은 놈을 만나 X같은 인생이 된 듯한

X같은 그 때

배드민턴이 매력적으로 다가온 건

배드민턴이 빠르고 공격적인 운동이라서였던 듯싶다.




tip. 모든 감정은 생존에 도움이 될 수 있기에 진화과정에도 사라지지 않고 건재해있다. 욕구가 좌절되거나 경계선이 침범당할 때 일어나는 감정이 화, 분노이다. 분노는 자신을 보호하고,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통 분노를 억제한다. 이런 것은 품위 없고, 미숙하고, 위험하다고 여긴다. 대부분 어릴 때 화를 내고 울며 씩씩거려본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때 ‘뭐 그런 일로 화내냐?!’ ‘뭘 잘 했다고 씩씩거리냐?!’, ‘니가 잘못해놓고 왜 화를 내냐?!’, ‘울거면 저리가~!’, ‘니가 예민해서 그렇다~’, ‘니가 어려서 그렇다’ 등 많은 경우 부모는 무엇 때문에 화내는지를 충분히 이해해주지 않고, 화내는 것 자체를 싫어하고 기피하고 화내지 않도록 윽박지르거나 강요한다. 이 경우 아이는 받은 상처에다 모욕감까지 받게 되는 샘이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 이런 저런 침해와 상처를 받고도 다른 식으로 포장하거나 합리화하거나 아예 부인해버리는 패턴을 발달시키게 된다. 밖으로 나가는 길이 차단된 분노는 안에서 곪게 되고 수치심, 죄책감, 무력감 같은 소리 없는 흡혈귀가 된다. 이 흡혈귀는 활기와 생명력을 빨아먹으며 타고난 자기다움을 차단한다. 점점 자신이 뭘 원하는지 어디로 나아가고 싶은지 알 수 없게 된다. 동시에 왠지 모르게 위축되거나 뭔가 잘 못 한 것 같다거나 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태에 점점 익숙해진다. 개구리가 미지근한 물에서 서서히 죽어가 듯 서서히 시들해져 가고 종국에는 남의 인생에 종속되고 만다.

  분노를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거란 걸 기억하자. 화가 날 때는 다 이유가 있다. 그러니 분노를 억압하지 말고 인정해주고, 분노 에너지를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건설적인 방향으로 끌어 쓸 수 있도록 해보자. 분노 에너지에 힘입어 문제를 해결하는데 전념하거나 자신을 성장시켜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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