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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얄리 Oct 22. 2023

제5화. 사건에 가려진 맥락

배드민턴은 생각보다 훨씬 격렬한 운동이다.

공이 빠르고, 강약조절이 섬세하게 요구되는 예민한 운동으로,

배워야할 기술도 많다.

동호회 분위기도 무시와 냉대가 은근하게 깔려있어

1년에 10명이 입회하면 겨우 1~2명만 살아남는 식이다.

결코 만만한 운동이 아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이런 사실을 몰랐다.

배드민턴 라켓을 처음 잡은 건 연애초반 27살 때였다.

당시 배드민턴에 푹 빠진 남친(남편)이 하도 같이 하자고 조르기에

그래 일단 한번 해보자는 식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1년 뒤 결혼도 꼭 그런 식으로 했다.


스물여덟 가을.

남편이 서둘러 결혼을 하자고 했고,

그의 페이스에 말려 후다닥 결혼식을 올렸다.

불안한 구석이 있긴 했지만 살짝 무시했다.

적극적인 구애에 정신이 혼미했다.


처음에는 달콤했다.

행복한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그 달콤함과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니 꽤 오래갔다. 대략 6년은 유효했으니.

그 뒤로는 만족감 보다는 불만족이 쌓여갔다.


나는 남편으로부터

정서적인 친밀감이나 유대감,

경제적인 보상이나 안정감,

육체적인 쾌락이나 만족,

그 어느 것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남편이라는 존재가

나의 ‘부모노릇’이나 ‘자식노릇’에 필요할 뿐

나라는 존재에게 이득 되는 게 없었다.

남편을 보면 오히려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될 뿐이었다.


남편은 퇴근 후 맥주와 소주 각 한 두 병씩을 마시며

영화나 드라마 혹은 인터넷 뉴스를 보았다.

나에 대해서나 나와 대화를 나누는 것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매달 월급을 벌어오긴 했으나

투자 실패로 결혼 10년차에도 내 집 마련이 요원했으며

남편 벌이로는 4인 가구 생활이 어려웠고

나는 생계를 위해 육아를 하면서

계약직, 프리랜서, 알바라는 이름으로

계속 일을 해야 했다.


섹스에 대해서도

내가 오르가즘의 도입부에 도착했을 때

남편은 이미 오르가즘을 통과하고 그 끝에 서 있었다.

섹스의 끝은 하다가 만 느낌이랄까.

뭔가 이용당하는 듯한 불쾌한 느낌을 감내해야했다.


이런저런 노력을 했던 것도 같지만,

불만족을 근원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했다.

궁여지책으로 찾은 것이 졸혼이었다.


결혼 7년 차부터

‘둘째가 20살이 되는 내 나이 50살에는

졸혼을 하겠어’라는 말이 입에서 나왔다.

50살이 되려면 12년이나 기다려야 하지만,

그 동안 혼자 살 수 있는 힘을 키우는 시간으로 삼기로 했다.

아이들 돌보는 것 외에는

커리어 개발과 일에 매진했다.


삼 년 전 봄은

졸혼이란 말을 뱉고 산 지 삼 년 즘 되는

결혼 10주년 된 해였다.


시궁창 같은 내 마음과는 대조적으로

따스한 햇살이 은은하게 퍼져있는 S의 상담실.

“결혼생활에 대해 얘기해 볼 수 있겠어요?” S가 물어왔다.

이런 저런 질문에 대답하다보니

비극의 주인공인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비극이 나와 무관하게 벌어진 것이 아니고

나를 통해 일어난 것이라는 것이 서서히 알아차려졌다.


28살의 ‘나’는 주체성이라는 감각을 획득하지 못한 상태였다.

남편에게 심리적으로 종속되고 의존된 상태로

말에 올라타듯 그의 욕구와 감정, 기대에 편승해 결혼을 했던 거였다.

불행의 씨앗은 이러한 상호종속적인 심리상태에 이미 내재해 있었다.


결혼 6년까지는 임신과 출산이라는 낯설고 신비로운 경험을 하며

힘들긴 했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경이로운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이 웬만큼 크고 난 후로

그 불행의 씨앗은 불만족이라는 느낌으로 만개했다.

갈등이 깊어지고 있었던 3년 간

내가 말하고 다녔던 ‘졸혼’은

‘나 불행해. 끝내고 싶어’라는 깊은 절망과 차단의 다른 표현이었다.

남편의 외도는 그런 맥락에서 발생한 반작용,

어찌 보면 당연한 파국이었다.  



tip. 부부갈등은 대개 밀월단계,안정화단계,트라우마단계로 진행된다. 허니문이라고도 하는 밀월단계는 서로의 차이에 매혹되고 긍정적인 보완관계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단계이다. 안정화 단계는 서서히 두 사람의 차이가 갈등 요소로 등장하는 시기이다. 안정화 단계에서 갈등을 적절히 다루지 못하고 방치하거나 익숙한 대로 하게 되면 갈등이 증폭되면서 트라우마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트라우마 단계에서는 에너지가 부부 사이에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흐르지 못한다. 에너지가 부부 사이에서 부정적이거나 제대로 흐르지 못할 때, 부부관계에서 탈출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찾게 된다, 가장 파괴적인 방법으로 자살이나 배우자 살인, 정신질환 같이 치명적이고 극단적인 방식 있다. 외도는 덜 극단적이며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주요 탈출구 중의 하나이다. 에너지는 결코 없어지지 않고 단지 방향을 바꾸는 것이어서, 두 사람 사이에 에너지가 흐르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흐르게 된다. 아내가 자녀나 공부에 몰두하고 남편은 일이나 스포츠에 몰두하는 식으로 되기 십상이다. 남편이 바람을 피는 동안 아내는 자녀 양육이나 공부에 푹 빠져 있는 경우도 모두 외도에 해당한다. 외도는 흐르지 않고 죽어있는 관계, 죽어있는 에너지에서 빠져나와 충분히 살아있으려는 시도라는 것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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