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 처음 한 달 간은 거의 탈진된 광인이었다.
사건의 전말을 알기 위한
집요하고 광기 어린 몸부림이 극에 달해 있었다.
남편의 핸드폰 뿐 아니라 그의 소지품을 이 잡듯
헤집는 일에 매몰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출장 갈 때 주로 쓰는
그의 가방에서 콘돔을 발견했더랬다.
추궁을 하자 예전에 가족 여행 갔을 때 묵었던 호텔에서
챙긴 거라고 했다. 셋째 생길까봐 걱정하던 때였다며.
처음 파악한 외도와 다른 결의 외도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후 더욱 집요하게 증거를 찾아봤지만
콘돔 외에는 뚜렷한 물증이 없었다.
그러나 그 후 침투적 망상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다른 이와 달달하게 대화를 나누고
손을 잡고, 키스를 하는 망상.
키스만으로도 충분히 괴롭고 역겨웠다.
배신감, 분노, 비참함에 더해 역겨운 망상에까지 시달리게 된 것이다.
이런 감정들을 안고 이 결혼을 유지할 수 있을까?
아침 일찍 가정법원에 들러 혼자서 할 수 있는 서류작성을 다 한 다음
정해진 시간에 맞춰 상담실에 갔다.
이혼결심을 제일 처음 S에게 말했다.
단호하고 덤덤하게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 끝이 떨려왔다.
S는 나의 고통과 결심에 대해 그윽한 눈빛으로
주의 깊게 들어주었다.
그리고 차분하면서도 부드러운 어투로
“이혼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한 번 들어볼래요?”
“네”
“상처 입었을 때 충분히 아파하지 않고
상처를 준 상대에게
네가 날 이렇게 아프게 했다고
이야기할 엄두도 내지도 않고
상처받지 않은 마냥 관계를 끊고,
단 번에 벗어나는 패턴,
이 오랜 패턴이 작동하는 것 같아요.”
“...”
“어린 아이일 때는 이렇게 말고 뭘 더 어떻게 할 수 있었겠어요.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도 이것이 최선일까요?”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먹먹한 상태를 지나
무슨 짐승새끼 우는 마냥 소리 내어 울부짖었다.
머리로는 내가 지금 왜 울지?
이게 울 일이야?라며 제동을 걸어보았지만
몸뚱이가 계속 들썩이며 머리와 따로 놀고 있었다.
사람을 앞에 두고 이렇게 엉엉 운 적이 있었던가?
사춘기 때 뭔 일이었는지 전후 사정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 방에서 이불을 덮어쓰고
울음소리가 새어나갈까 걱정하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던 때가 떠올랐다.
3분? 길어도 5분 정도가 지났을까 싶었는데
20분이 넘는 시간을 그렇게 울고 울고 또 울었더라.
서른여덟 살도 울고,
서른여덟 살 안에 살아있는
두 살도 사춘기 소녀도 울었던 듯하다.
경기하는 걸보면 배드민턴 초보자인지 아닌지 금방 알 수 있다.
이 한 방에 끝내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담아 잔뜩 힘주어 세게 내려치는 사람은
백이면 백 초보다.
신중하게 치되,
그 다음 공을 예상하며 칠 수 있을 때라야
배드민턴을 좀 치는 사람 축에 들어갈 수 있다.
가슴 속 울분을 토해내니
그 만큼 마음의 공간이 생겨서일까?
이혼을 할 때 하더라도
잔뜩 힘주고 한 방에 게임을 끝내려는 초보가 아니라
판과 흐름을 읽는 고수처럼 해보기로 했다.
구질구질해 보여서 저항감이 있었지만,
그게 인생의 고수가 되는 길이겠다 싶어
낯설어 하기 싫고 좀 더 어렵게 느껴져도 한 번 해보기로 했다.
tip. 어린 시절, 우리가 여리고 순진하고 뭘 잘 모르던 어린이였던 시절 우리 각자는 자신이 처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을 보호하는 방어기제와 생존기술을 발달시킨다. 나의 경우 상처를 받았을 때 그 관계에서 물러서고 차단하는 식으로 나를 보호해왔던 것이다. 분노를 인식하고 그 에너지를 적절히 사용할 수 없게 되다 보니, 분노를 품에 안고 관계를 끊어내는 식의 수동공격적인 패턴을 발달시킨 것이다. 반복되는 정서적 상처와 절망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그러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달시키게 된 방어기제의 일종이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필요했던 방어기제가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참된 성장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된다.
결혼이나 사업, 일, 건강, 가족관계가 파국을 치닫고 위기가 왔다면, 나(참자아, true Self)를 보호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방어적인 나(거짓자아, pseudo self)의 유효기간이 끝이 났다는 신호라고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