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를 지혜롭게
가난하고 요령도 없었고 멘토도 없었다. 지능도 평범한 수준이다 보니 무식하게 공부는 했지만 성적이 뛰어나지 않았다. 그 당시 가장 좋은 성적을 내는 아이들은 K 공고를 많이 갔었다. 모든 학비가 무료이고 먹여주며 입혀 주니 가난한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의 학교였다. 전교 3퍼센트 내의 아이들만 갈 수 있었기에 일찌감치 포기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것이 얼마나 잘 된 일인지 모르겠다. 그들은 졸업하면 하사관으로 5년간 군 복무를 해야 했고 그들의 실력에 비해서는 그리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에 갈 수 있는 옵션은 두 가지였다. 상업고등학교를 가던지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던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사실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빨리 졸업하고 취업하기를 원하셨다. 동생들도 둘이나 있었기에 아버지는 어떻게든 경제적인 부담을 덜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솔직히 상고를 가고 싶진 않았다. 선생님들도 나의 진로를 결정하는 데 한몫하셨다. 다니던 중학교가 상고와 함께 붙어있었고 상고 선생님들 중에 일부는 중학생도 가르치기도 하셨다. 그런데 선생님은 왠지 상고를 천시하는 말씀을 하셨다. 물론 시내에 있는 여자 상업고등학교의 상위권 아이들이 대부분 가기는 했지만 우리 학교와 붙어있던 상업고등학교는 성적이 낮은 아이들이 많이 가긴 했다.
시내에 유일하게 하나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래도 한 반에 70명 아이들 중 최소한 10등 이내에는 들어야 했다. 중학교 2학년 때에는 정말 성적이 간당간당해서 자칫하면 원치 않는 상고에 가야 할 판이었다.
그래서 발목을 잡았던 영어공부를 3학년 때 시작했다. 단어를 다 외우고 문법을 잘 모르니 그냥 책을 외웠다. 다행히 원하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갈 수 있는 성적은 되었으나 아버지를 설득하는 것이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지금 연세가 지긋하셔도 아직도 내 맘에는 두려움이 있을 정도다. 용기를 내어 "아버지 제가 원하는 고등학교까지만 갈 수 있게 해 주세요. 대학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하고 말씀드렸다.
사실 그 당시 집안 형편으로는 대학을 간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상황이었으므로 내가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었지만 그것이 아버지에게 믿음을 주었나 보다. 그래서 원하는 고등학교에 가게 되었다.
먼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다시 버스를 타고 내려서도 한참 걸어서 통학을 해야 했지만 힘든 줄 몰랐다. 학교를 마치면 학교 앞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따라 시내 쪽으로 조금 오면 다리가 있다. 이 다리를 지나면 고속도로가 위로 지나가는 터널을 통과하게 된다. 그런 후 조금만 더 가면 어석한 골목을 지나게 되어 있다.
어느 날 그 골목에 들어서자 두 명의 아이가 양쪽에서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내밀었다. 돈을 달라는 것이다. "벼룩의 가을 빼 먹지 내게 무슨 돈이 있다고... "
그런데 내가 누구인가 중학교에서 한 주먹 했었는데 두 명 정도는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뭐라고?" 하며 골목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지금은 군 생활과 사내 강의 등을 통해 목을 안 좋게 많이 써서 목이 좀 상했지만 중학교 때 음악 선생님이 성악을 하라고 할 만큼 목소리는 남자 못지않게 크고 좋았다. 돈을 빼앗으려던 아이들이 움찔하며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때 불현듯 스쳐 지나간 소문이 생각났다. 시골 불량배에 비해 이렇게 도시의 불량배들은 칼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은 것이다. 그래서 얼른 "백 원밖에 없는데" 하며 주머니에서 백 원을 꺼내 주었다. 그 친구들도 더 건드렸다가는 한판 벌어지겠다 싶어 그냥 그 정도 선에서 보내주었다. 사실 차비가 없으면 집에 갈 수 없었기에 차비는 남겨 두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