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출간했다고 은이의 삶에 딱히 변화가 생긴 것은 아니었다. 무명 출판사에서 책을 낸 무명작가. 은이는 직장을 구할 때 이력서에 이것을 써야 하는지 딱 한 번 고민했고, 쓰지 않기로 결심한 이후로 다시는 고민하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 심지어 가족들에게도 출간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은이는 자신의 이야기가 책이 된 것이 못내 부끄러웠다. 그런데도 아퀴나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책으로 낸 것은, 오직 언젠가 그가 자신의 책을 봐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와 은이의 이야기는 투숙객들 사이의 이야기인양 변형해서 짧은 에피소드로 끼워 넣었다. 그 이야기는 편지에 쓰지 않았던 내용이었기 때문에, 이 에피소드가 은이 본인의 것임을 아퀴나스가 눈치를 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퀴나스는 그 에피소드에 대해서 따로 의견을 말하거나 하지 않았고, 그저 ‘대체로 모든 에피소드가 흥미롭다’ 고만 전체적인 감상을 전했을 뿐이었다.
아퀴나스 신부가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책을 출간한 지 8년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는 은이자매가 사제복을 입은 자신을 꼭 봐야 한다며 농담처럼 자신의 귀환 소식을 알려왔다. 은이가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두고 프랜차이즈 카페에 시간제로 일하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은이는 공항으로 마중을 나가겠다고 회신을 했다. 반가운 것은 둘째 치고, 은이는 파리에서 돌아온 이후 한 번도 공항에 가보지 못했고, 아퀴나스를 핑계 삼아 오랜만에 공항에 가고 싶었던 것이다. 아퀴나스는 은이의 의도를 단 번에 알아차렸다. 자신을 이용해 줘서 고맙다고 정중하게 인사말을 보낸 이메일을 보며 은이는 코웃음을 쳤다. ‘이런 건 귀신 같이 알아차린단 말이지.’
공항의 출국장과 입국장은 분위기가 꽤나 달랐다. 일찍 도착한 은이는 출국장 근처에서 잠시 서성이다가 터덜터덜 입국장으로 내려갔다.
‘출국과 입국, 어디가 끝이고 어디가 시작일까?’ 은이는 입국장이 잘 보이는 카페에 앉아 정답이 없는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물어보며 시간을 보냈다. 아퀴나스가 타고 있는 비행기의 착륙 소식이 뜬 것이 보였다. 아직 나오려면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몸을 일으켰다. 딱히 보고 싶다거나 한 적이 없는 인간이었지만 십 년 만에 만난다고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들떴다. 은이는 커피잔을 치우려고 일어나다가 멀리 보이는 실루엣을 보고는 재빠르게 자리에 다시 앉았다.
‘수호 녀석이다!’
수호는 은이를 아직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이쪽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입국장에서 멀찍이 떨어져 선 채로 출구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은이는 몸을 최대한 낮춘 채 수호를 관찰했다. 셔츠에 정장바지를 입은 녀석의 모습은 십여 년 전과 크게 변한 것은 없어 보이는 것 같기도 했고, 아예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거리가 있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입꼬리를 내린 채 팔짱을 끼고 한 곳을 노려보듯 바라보며 서있는 모습은 그대로였다.
은이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녀석은 분명 아퀴나스를 기다리는 것이리라. 둘의 만남에 내가 또 끼어드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은이는 신속하게 결론을 내렸다. 일단 이곳에서 둘의 만남을 관찰한다. 그 후에 끼어들 것인지, 아니면 조용히 돌아갈 것인지를 결정한다!
기다리는 시간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은이는 화단 뒷자리에 최대한 몸을 낮춘 상태로 앉아 있느라 몸이 뻐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차피 수호가 이쪽을 보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몸이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책을 읽는 척하며 얼굴 가릴 용도로 턱을 괸 손가락 사이로 힐끔힐끔 수호를 보기도 했다. 한참이 지난 후에 입국장 문이 열리고 이윽고 로마에서 출발한 비행기의 승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은이는 수호와 입국장을 동시에 보느라 눈이 양 옆으로 벌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눈을 살짝 돌려 수호 쪽을 봤다. 녀석은 여전히, 마네킨이라도 된 듯이 한 자리에 우뚝 서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다시 눈을 반대쪽으로 돌려 입국장 출구를 바라봤다. 멀리에 검은색 셔츠를 입은 인간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아퀴나스였다. 수도원에 소속된 사제들처럼 모자 달린 망토라도 두르고 들어올 줄 알았는데 지극히 평범한 모습이어서 은이는 살짝 실망했다. 로만칼라의 검은색 셔츠에 검은 바지. 누군가를 찾는 듯 고개를 좌우로 돌아보는 모습. 은이는 수호가 녀석을 발견했는지 궁금해서 다시 눈을 돌렸다. 그러나 수호가 있어야 할 그 자리에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은이는 당황해서 목을 빼고 주변을 샅샅이 훑어봤다. 그러나 어디에도 녀석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입국장 쪽을 보니 아퀴나스는 열린 문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사람들을 방해하는 애매한 위치에 서서 난감하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난감한 것은 은이었다. 아퀴나스에게 다가가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잠시 고민하며 다시 사람들을 훑어보았지만 여전히 수호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은이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수호 저 자식… 차라리 오질 말든가.”
은이는 한숨을 크게 쉬고 의자에서 일어나 빠르게 커피잔을 반납하고 입국장으로 걸어갔다.
“…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