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퀴나스 신부와 은이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만나서 커피를 마시거나 성당 근처의 레코드 가게에 음반 쇼핑을 하러 가기도 했다. 짧은 외출의 대부분은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일을 제외하고는 은이와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다. 은이는 아퀴나스가 사제가 된 것이, 아퀴나스 신부가 좋았다. 한 번은 그에게 그런 마음을 얘기한 적도 있었다.
“신부님이 사제가 되어 얼마나 좋은지 내가 얘기한 적 있어요?”
“내가 사제가 된 게 왜 좋아요?”
“글쎄요, 전에 알던 친구 녀석이 분명 남아있긴 한데 전혀 다른 사람 같아요.”
“예전에 알던 친구 녀석은 영 별로였던 모양이군요.” 은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퀴나스 신부도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죄책감이 느껴지는데… 난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서 가끔 신에게 용서를 구할 때가 있는걸요.”
“아냐, 그럴 거 없어요. 이전에 살던 그 재수 없는 속물은 아주 조금만 남아있어요. 대부분은 새로 태어난 신의 종, 신실한 사제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요.”
“영 별로였던 정도가 아니라 재수 없는 속물이라고요? 어디가 그렇게… 그랬는데요?”
“어휴, 존재 자체가 그랬죠. 제가 신부님을 보면 없던 신앙심이 다 생깁니다. 신앙의 힘이 이렇게 위대하다니!”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제가, 아니 지금은 조금만 남아있는 그 인물의 어디가 그렇게… ”
“숨 쉬듯 잘난 체를 했거든요, 그 존재가.”
“음. 지금도 조금은 남아있다고요?”
“네, 그렇죠.”
“예를 들어서?”
“좀 전에 음반 가게에서의 장광설? 그레고리안 성가에 관심도 없는 사람에게 이십 분이 넘는 긴 이야기를 늘어놓다니.”
“으음. 그건 지식을 나누고자 하는 일종의 배려 아닐까요?”
“아닙니다.”
“네.” 아퀴나스 신부가 포기한 듯 커피잔을 들어 호록 마셨다. 은이는 그 모습을 보다 미소를 지었다.
“신부님이 되기 전이었다면 이쯤에서 저를 비열한 방법으로 공격하려고 시도했겠지요. 하지만 신부님은 안 그러시잖아요? 그러니 좋을 수밖에요.”
“그…렇군요.”
“정말 좋아요, 신부님.”
“유혹하지 마세요.”
“아잉.”
대화는 대부분 이런 식으로 흘러갔다. 합을 잘 짜놓은 만담처럼, 대부분 농담으로 이루어진 반죽에 가끔 톡 쏘는 진심을 섞어서 뭉뚱그려 넣는 식으로. 그들은 그런 시답지 않은 대화를 하며 커피를 마시고, 음반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고, 아퀴나스 신부가 들려주는 로마의 이야기를 듣는 식으로 시간을 보낸 후 헤어졌다.
수호가 그 자리에 끼는 일은 없었다. 한국에 돌아온 지 몇 달 정도 후에 수호를 다시 만난 적 있느냐고 물어봤지만 아퀴나스 신부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수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은 아퀴나스 신부가 한국으로 돌아온 지 일 년 하고도 육 개월이 지난 후였다.
은이는, 당연하지만, 아퀴나스 신부로부터 그 소식을 들었다. 막 저녁 식사를 차려 먹으려던 차에 아퀴나스 신부로부터 전화가 왔다. 은이는 저녁을 먹고 나서 자신이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을 하기 위해 전화를 받았다.
“신부님, 내가 지금 막 저녁을 먹으려던 참이라서… ”
“수호가 죽었어.”
“네?”
“수호가 죽었다고.” 아퀴나스 신부의 작고 떨리는 목소리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뭔지는 몰라도 굉장히 슬프게 들리는데? 은이는 몇 초 정도 마치 모르는 사람의 소식을 우연히 들은 듯 느껴져서 어떤 나른한 감정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듣고 있어?” 아퀴나스 신부의 말을 듣고서야 은이는 정신을 차렸다. ‘수호가 죽었다?’
“왜?” ‘이게 맞는 질문일까?’ 은이는 동시에 두 개의 질문을 했다. 하나는 아퀴나스 신부에게, 하나는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었대.” 아퀴나스 신부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바로 전화가 끊겼다. 자기 통제가 안 되자 전화를 끊은 모양이었다.
은이는 휴대폰을 든 상태로 잠시 가만 서 있었다. 머릿속은 질문으로 가득 찼고, 하나 같이 누구도 대답을 해줄 수 없는 종류의 것들이었다. 심지어 밥을 먹어도 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런 소식을 듣고 밥을 먹어도 되는 것일까? 아퀴나스는 다시 전화를 할까? 내가 다시 해봐야 하나?
대체 수호는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나?
은이는 아퀴나스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휴대폰을 들었다. 그리고 휴대폰에 읽지 않은 메시지가 떠있는 것을 발견했다. 모르는 번호로 온 메시지는 ‘번호가 아직도 바뀌지 않았다면, 은이의 …’라는 글로 시작되고 있었다.
‘번호가 아직도 바뀌지 않았다면, 은이의 번호가 맞겠지? 나 수호야.
간혹 셋이 파리에 갔던 때를 떠올리곤 해.
차라리 가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도.
네게 이런 부탁을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퀴나스 신부… 녀석에게 전해 줘.
나는 한 번도 파리에서의 마지막 밤을 잊어본 적 없다고.
잘 지내라. 이런 부탁을 해서 미안하다.’
은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호 녀석이 죽기 전에 문자를 보낸 것이다. 은이가 눈물을 훔치며 중얼거렸다. “아, 짜증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