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한겨울 밤의 녹취록

그 순간 즉흥연기를

by 적적

스물세 번째 절기였던 소한은 1월 15일 무렵입니다. 작을 소자가 쓰였지만, 이때가 최저기온을 나타냅니다.

‘대한이 소한집에 가서 얼어 죽는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추위를 이겨냄으로써 어떤 역경도 감내하고자 했던 까닭으로

‘소한 추위는 꾸어다가도 한다.’

라고도 합니다.

24 절기 가운데 마지막 스물네 번째 절기는 대한입니다. 매듭을 짓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양력으로는 1월 20일 무렵입니다.

‘춥지 않은 소한 없고 포근하지 않은 대한 없다.’

‘소한의 얼음이 대한에 녹는다.’


겨울도 기울어지고 있는 셈인 거죠.

제법 순했던 겨울로 기억되어 다행인지도 모릅니다.

이제 첫 번째 절기인 입춘을 앞두고 가만있는 사람도 미묘하고 간지러운 마음이 돋아나게 할 것입니다. 일단 밖으로 나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손등이 시린 금요일 밤이었으므로


어제는 그러니까 내일 기온이 비교적 따스할 거라는 말을 듣고 말이죠.

두꺼운 오리털로 만든 파카를 걸치고 집으로 돌아갈 길도 생각하지 않은 채 밤 산책을 다녀왔습니다.


그렇게 가로수를 지나고 낯선 골목길은 골목이 끝나는 곳에서 다른 골목에 손을 뻗어 잡고 다시 끝없는 골목의 비밀의 열쇠를 내놓지 않고 이어져갔어요.


그때 즈음 J가 떠올랐죠. 더 정확히 말하자면 J의 아내가 떠올랐는데, 더 정확히 말하면 J의 아내와 저는 한동네에서 자랐습니다. 동네에선 엄청난 여성이었죠. J는 중학교 때 전학을 와서 친해졌습니다.


이렇게 아침저녁의 계절과 한낮의 햇살이 달라질 때 그녀의 생일이 있었던 거죠. 사실 J는 잔꾀를 부릴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어쩌면 그의 그런 습관이 혹은 습성이 그를 젊은 나이에 제법 큰 카센터를 운영하는 사장님 자리에 앉혀 놓았는지 모르죠.


자동차를 가진 사람은 다 알겠지만, J는 방문하는 모든 손님에게 잔꾀를 부리지 않고 그러니까 성실하게 수리를 해줬으며 어떤 시간에도 예약받아 자동차를 출고시켰으며 작은 이문을 남기며 주변에 가게 이름을 알리지 않았지만, 소문만으로 다시 찾는 손님이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혼자 운영하던 카센터에 직원이 하나둘 늘어가도 J는 카센터 사무실 쿠션이 하나도 없어서 엉덩이가 아픈 의자에 앉아 손님을 기다리고 지나는 친구들을 맞이하며 하루를 보냈었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즈음 J가 했던 말이 유난히 돌부리처럼 머릿속에 남아 달그락거리곤 했어요.


사람들도 자동차 같으면 좋겠어 말없이 엔진오일을 갈고 워셔액을 채우면 특별히 달라지지 않는 일상이 계속될 수 있다면….


잔꾀도 없고 성실하기까지 한 J에서 전화가 오자 분명 J의 아내와의 문제란 걸 알 수 있었죠.

둘이 싸우면 번갈아 가며 전화를 하곤 했었거든요.

일밖에 모르던 남편을 기다리며 연년생 사내아이 둘과 씨름하던 그녀와 점점 말다툼이 심해졌어요. 기억할 수도 없는 아주 사소한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번져가고 있었죠. J의 말로는 어느 순간 미안하다고 말했어야 할 기회를 계속 놓치고 있다는 속내를 말하곤 했었죠.


게다가 치명적인 실수로 그녀의 생일을 하루 지나고 생각이 났다는 거였죠. 태어나 잔꾀를 부린 적이 그런 생각을 해본 적도 없는 J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것이 분명해 보였어요.


자 지금부터는 웃으며 말할 수 있다는 J 아내의 이야기.


두 아이에게 영혼까지 뜯겨 나가는 것도 자는 것도 제대로 해본 기억이 나지 않던 어느 날 J와 기억나지도 않는 말다툼을 한 끝에 며칠째 혼자서 자동차를 고치느라 힘들었던 J가 싸우는 도중 잠이 든 걸 보게 된 거죠. 싸우고 있는데 잠을 자 너무 미워서 너무 미워서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

잠든 J를 깨워 미안하다는 말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줬는데 머뭇거리며 기회를 놓치고 후회하는 표정을 보며 일단 둘 다 잠부터 자기로 하고 아침을 맞았다고


J는 이미 자리에 없고 아이들 기저귀를 갈고 흘러내린 머리카락도 넘길 수 없을 때쯤 친정엄마한테 전화가 왔는데


미역국은 먹었니?


터져 나온 울음소리를 두 아이의 울음소리가 막아내던 순간


전화가 한 통 오더래


OOO 님 댁이죠 오늘 10시 방문 예정인데 괜찮으시겠어요?


사내 둘이 현관문 앞에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아주 미안한 표정으로 서 있더래


J고객님께서 신청하신 생일 파티 예약이 저희 쪽 잘못으로 진행되지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잘생기고 건장한 젊은 사내 둘이 서둘러 집으로 들어서더니 집안을 치우고 아이를 달래며 들고 있던 장미꽃다발을 탁자에 놓았데. 작은 보온가방에서 미역국과 여러 가지 반찬들이 식탁에 놓이고 신경 쓰지 마시고 식사부터 하시라며 아이들을 안아주었는데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울지 않았고 음식들을 먹는 동안 J를 생각했는데 마음이 녹아내리는 게 느껴졌데


잔꾀를 부릴 줄 모르는 J가 귀여웠데.


어느 순간 J가 제일 좋아하는 청국장을 끓이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자신을 마주하며 웃었다고 하더라구.

몇 년이 지난 뒤에 J의 아침을 이야기했지, 그녀의 생일을 잊었던 아침을 말이야.


이벤트업체에 전화를 걸어 예약하려고 하자 기념일이 지난 행사는 할 수가 없다고 하더래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잖아 잔꾀를 부릴 줄 모르던 J가 사정이 있어 하루 늦었지만, 돈은 얼마든지 더 줄 테니 제발….


J의 아내는 모든 것을 알고 계셨지. 이벤트 회사직원들은 연기력이 턱없이 부족했데. 표정은 경직되고 손까지 떨고 있는 게 보이더래. 그 추운 겨울에 이마에 흐르는 땀까지 보이더래 자꾸만 눈길을 피했다는 거야. 물론 아이들을 잘 보았고 가져온 음식들은 만족할 만큼은 아니었지만 맛있었다고.


이렇게 겨울이 한창이던 어느 날이면 지금도 잘 살아 있는 J와 군대도 다녀온 두 아들과 돈도 많고 좋은 아내도 있지만, 아직도 잔꾀를 부리지 않는.


그날 그 전화를 받고 울 것 같은 J를 달래서 예전에 극단에서 일하던 후배에게 전화했어


즉흥연기를 하면 된다고 시급은 최고로 줄 거라고 딱 1시간만 있다가 오라고


사진출처> pinterest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05화숲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