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두둑한 값을 쳐드립니다.
퇴근을 합니다. 퇴근하려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일상으로 밀입국한 불법체류자들은 불안합니다. 온종일 불평불만으로 투덜거리며 정신없던 사무실을 나옵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볼륨을 최대치로 높이면 자동차 소리와 사람들 소리 그리고 바람이 햇살을 뜯어먹는 소리까지 음소거됩니다. 음악 소리를 방탄복처럼 입고 길을 걷습니다. 어떤 소음의 총알도 나를 죽일 수 없을 거라 믿고. 물론 네가 듣고 있는 음악 소리가 제일 큰 소음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겠지만.
고개를 숙입니다. 앞을 바라보지도 않습니다. 걷다 보면 사거리 신호등이 나오고 잠시 신호를 기다렸다가 길을 건넌 뒤 다음 건널목 앞에 서서 건물 모퉁이 커다란 거울 앞의 나를 봅니다.
잘 견뎠네 이제 여기 건너서 등을 돌리면 노을을 볼 때까지 곁눈질도 하지 말고 바닥을 보고 걷습니다. 집 앞 편의점 사거리에서 뒤를 돌아봐 이게 오늘 내가 나에게 주는 최고의 노을이다.
다섯 시의 노을은 오일파스텔에 가깝고 일곱 시의 노을은 유화에 가까우니까
겨울. 다섯 시의 노을이 좋아
태양이 멈춘 시간, 앞 차와의 간격을 위해 잠시 정차한 지하철처럼 사람들도 순하게 만드는 시간, 분홍과 연보라를 섞어 놓은 색의 시간, 눈부시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시간, 아마도 천국은 늘 다섯 시의 노을이 지는 시간일 것 같단 생각을 하게 되는 시간. 이 시간 후부터 갑자기 시간이 아까워지는 시간, 아직 밤의 입장권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수많은 수개미가 여왕개미를 따라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시간, 땅의 모든 일개미가 외박하는 여왕개미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시간, 마구 흔든 막걸리가 뚜껑으로 새어 나오며 흰 포말이 밤을 재촉하는 시간, 그녀의 깍지 낀 손이 내 코트 속으로 같이 들어오는 시간, 하루 단 한 번 천국이 되는 시간.
오늘도 아무 일도 없었다. 다행히 아픈 곳은 발견되지 않았고 찰과상을 입은 곳도 마음의 상처도 없다 돌아가 기다리던 모란의 화장실을 청소하고 사료를 채워 넣고 물을 갈아주고 무릎에 앉을 때 까기 기다렸다가 머리를 쓰다듬거나 손가락을 몇 번 물린 뒤 모란이 무릎에서 내려가기를 기다린다.
잠들기 전까지 노을의 장물아비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