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얼굴.
깊은 밤, 창밖을 바라보았다. 발에는 낡은 슬리퍼가 느슨하게 걸쳐져 있었다. 창가에 앉을 때 차가운 등받이가 가슴에 닿아 서늘한 기운이 퍼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손끝은 무릎 위에서 가볍게 포개졌고, 따뜻한 숨이 유리창에 닿아 흐릿한 안개처럼 퍼졌다. 달빛이 희미하게 숲을 비추고, 바람은 살짝 가지를 흔들며 지나갔다. 적막한 공기 속에서 무언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바스락, 바스락. 어둠 속에서 부드러운 실루엣이 서서히 드러났다. 그 순간, 숨을 삼켰다. 마치 밤과 함께 깨어난 신비로운 존재처럼, 사슴이 유령처럼 부유하며 나타났다.
처음 사슴을 보았을 때는 아주 어린 시절이었고 그다음 만났던 사슴을 기억하고 있다.
꿈속에서 걸어 나온 듯 조용하고 우아했다. 몸을 감싸는 빛이 달빛을 머금고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가벼운 안개가 주변을 감돌며 사슴의 존재를 더욱 흐릿하게 만들었고, 그 자체로 밤의 일부가 되어가는 것만 같았다. 검은 밤과 대비되는 하얀 얼룩이 신비로운 무늬를 이루며, 마치 별빛이 가볍게 내려앉은 듯 반짝였다.
그 눈동자는 깊은 고요를 머금고 있었고, 끝없는 밤을 지나온 흔적을 남겨두고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 가녀린 다리는 땅을 딛는 것이 아니라 공중을 떠도는 듯했다. 부드럽고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뿔은 가느다랗게 솟아올라 마치 달빛을 품은 듯했다. 뿔의 표면은 오래된 나무껍질처럼 거친 질감을 지녔고, 여러 갈래로 뻗어나간 끝부분은 정교하게 구부러져 있었다. 마치 오랜 세월을 지나며 자연이 직접 깎아낸 예술작품처럼, 뿔의 끝자락마다 미묘한 곡선이 흐르며 은은한 그림자를 깎아냈다. 사슴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보이지 않는 흔적이 남는 듯했다. 바람이 불어오면, 그 존재조차 한 줄기 안개로 녹아 사라질 것만 같았다.
숨을 죽이고 조용히 바라보았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사슴의 눈빛 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평온함과 그리움을 느꼈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존재를 다시 만난 듯한 기분이었다. 그 눈빛에는 시간의 흐름을 초월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경계 없이 투명하게 들여다보는 듯한 시선. 그 순간, 밤이 주는 정적 속에서 사슴의 존재는 마치 오랜 기억 속에서 잊힌 일부를 조용히 깨우는 듯했다.
사슴이 누구를 기다리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혹은 사슴이 찾아오는 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내가 아니었을까. 어린 시절, 꿈속에서 본 듯한 풍경이 떠올랐다. 빛바랜 기억 속에는 언젠가 마주쳤던 또 다른 사슴이 있었다. 이렇게 창가에 앉아 있었고, 그 사슴은 밤을 헤치고 나를 찾아왔었다. 기억은 희미했지만, 감각은 선명했다. 그때 느꼈던 따뜻함, 신비로운 낯섦,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안도감. 그것은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지금, 이 순간과 맞닿아 있는 필연이었을까.
거대한 뿔을 지니고 있던 사슴은 고개를 흔드는 일이 무척 힘겨워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자라난 뿔 사이로 사슴의 뿔과 남겨진 다른 사슴의 머리 부분이 걸쳐져 있기 때문이었다.
사슴들은 서로의 뿔을 교차시키며 뿔을 자르거나 단단한 목 근육을 이용해 자라난 뿔을 꺾느라 피를 흘린다. 그리고 결박된 것 같은 뿔이 풀리지 않으면 덩치가 작은 사슴은 뿔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끌려다니다 몸통이 떨어져 나가고 뿔과 연결된 얼굴에 뼈대가 드러나도록 뿔 끝에 다른 사슴을 매달고 다닌다.
패자였던 사슴은 목숨을 잃고, 승자였던 사슴도 고개를 들 수 없다. 두 개의 얼굴을 지닌 사슴의 다른 뿔을 온 힘을 다해 들어 올린다. 이토록 가볍게 대면한 것을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사슴도 나도 놀란다. 꺾여있던 목을 천천히 움직인다. 굳어있던 근육을 머리를 흔들며 깨운다.
사슴은 다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발걸음으로 숲 속으로 사라져 갔다. 가늘고 길게 뻗은 다리가 어둠 속으로 스며들며 점차 시야에서 희미해졌다. 나는 그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사슴은 나에게 무엇을 전하려 했던 걸까. 어쩌면 그건 단순한 방문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내 안에 남아 있는 어떤 감정을 일깨우려 했던 것일지도. 잊고 있던 감각, 혹은 감춰 두었던 그리움. 그 존재는 마치 마음속 깊이 묻어 두었던 기억의 문을 조용히 열어젖히고,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게 하는 듯했다.
사슴이 찾아오는 밤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순간이었다. 어둠 속에서 조용히 다가와 나를 바라보던 그 눈빛은, 내가 잊고 지냈던 나를 다시 일깨웠다. 사슴이 떠나간 자리에는 고요와 함께 설명할 수 없는 여운이 남아 있었다. 창가에 기대어 앉아 있던 나는 한동안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희미한 달빛이 창틀을 타고 내려와 방 안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밤 이후로 나는 종종 창가에 앉아 숲을 바라본다. 언젠가 다시 사슴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으며. 그리고 언젠가, 나도 사슴을 따라 숲 속으로 걸어갈지도 모른다. 혹은, 이미 그와 함께 어둠 속을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