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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대설주의보.

마지막 주자처럼

by 적적

지난밤부터 기상청의 문자 알림이 짧고 날카롭게 울린다. “3월 대설주의보.” 말도 안 돼. 3월에 눈이라니. 그 뜬금없는 눈은 4월에도 내린 기억이 난다. 겨울은 몸을 움직일 수 없지만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마지막 숨을 내쉬듯, 흩날리는 눈발이 창가를 휘감는다. 이불속에서 망설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검푸른 새벽 공기 속에서 하얀 눈송이들이 부유한다. 눈이 바람의 방향을 표시하는 작은 화살표처럼 내리고 있다. 가로등 불빛에 비치는 눈발은 어둠을 찢어내듯 날카롭게 흩어지다, 이내 부드럽게 땅 위에 포개진다. 차갑고 섬세한 시간이 뒤섞이며, 계절은 마치 뒤로 미끄러지는 듯하다. 이 순간만큼은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만 같다.



학교 운동장에서 계주 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마지막 주자였다. 마지막 주자는 책임감이 컸다. 내 손에 바통이 쥐어지면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온 힘을 다해 내달렸다. 앞선 주자들이 바람을 가르고 이어온 시간, 그 모든 순간이 내 발에 달려 있었다. 마지막 주자가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그 순간만큼은 누구도 다른 주자를 기억하지 않았다. 끝맺음은 언제나 가장 선명하게 남는다.

3월의 대설주의보 속에서 문득, 마지막 계주 선수를 떠올린다. 겨울이 바통을 쥐여주었다. 이제 달릴 차례다. 눈밭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나아가야 한다.



결승선은 골목 끝에 있는 작은 카페일지도 모른다. 온기 어린 커피 향이 창문 너머로 새어 나오고, 낡은 나무 의자에 앉아 눈이 녹는 소리를 들으며 숨을 고를 수 있는 곳. 아니면,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친구의 집 앞일 수도 있다. 내 손끝에 닿은 차가운 공기가 지나온 시간만큼이나 선명하게 느껴진다.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결승선을 모르지만, 걸음을 내디디면 길이 보일 것이다.

눈송이는 쉼 없이 쏟아지지만, 따뜻한 공기에 닿자마자 사라진다. 아스팔트 위로 내려앉는 듯싶다가 이내 물기를 남긴 채 스며든다. 눈이 쌓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쉽기까지 하다. 이 순간이 오래 남지 않을 것만 같아서.



거리는 고요하다.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눈에 당황해 발걸음을 재촉하고, 도로 위 차들도 속도를 줄인다. 눈이 사라지는 만큼 시간도 조용히 흘러간다. 그런데 다가오는 봄을 조금 미뤄도 괜찮을 것 같다. 겨울의 마지막을, 계절의 마지막 주자로서 제대로 마무리하고 싶다.



계절의 마지막 주자는 겨울도, 나도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에서 마지막 계주 선수일지도. 어제를 지나 오늘로, 그리고 오늘을 넘어 내일로. 우리는 매 순간, 시간이라는 트랙을 돌며 바통을 이어받고 내달린다. 언젠가는 우리가 건넨 바통을 누군가 받아 이어갈 것이다. 우리는 한 계절의 마지막이 아니라, 긴 계절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눈은 계속 내린다. 하지만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금세 녹아 사라진다. 흩어졌다가 사라지는 눈송이들처럼, 순간과 영원히 맞닿는 경계에서 나는 걸음을 내디딘다.

바통을 쥔 손끝이 시리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따뜻하다. 내 앞에는 길이 있고, 내 뒤에는 지나온 계절이 있다. 어디로 향할지 몰라도 상관없다. 지금, 이 눈 속에서 천천히 나아가는 순간만이 중요하다. 바람 속에 녹아드는 마지막 주자로서, 나만의 속도로, 나만의 결승선을 향해.

이 글의 끝을 향해.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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