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정신없이 분주 해질 것입니다.
새벽부터 내리던 눈이 지상을 하얗게 뒤덮고 있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조밀하게 내리는 눈송이들은 마치 세상의 모든 흔적을 덮어버리려는 듯, 부드럽게 내렸다 기온이 오르며 내리는 눈은 쌓이지 않고 바닥을 질척하게 덮어갔다. 방 안의 온기에 녹아드는 작은 물방울들이 천천히 흘러내리는 것을 바라보며 손끝으로 투명한 창에 조심스레 닿았다. 유리 너머로 펼쳐진 세상은 고요하고 적막했다. 그 순간, 문 앞에서 아주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겨울 속에서 길을 잃은 작은 존재가 조난신호를 보내듯, 조용하지만 분명한 바스락 거림.
문을 열자, 하얗게 성에 낀 공기 속에 작은 상자가 고요히 놓여 있었다. 얼어붙은 세상 속에서도 마치 한 조각의 온기를 품고 있는 듯, 희미하게 김이 서려 있었다. 상자 위에는 정갈한 글씨로 적힌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봄’이라고. 순간, 입가에 어렴풋이 미소가 번졌다. 흰 눈이 뒤덮인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그 단어가 기묘하게도 활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상자의 뚜껑을 열어 올리는 순간, 그 미소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상자 안에는 정말로 ‘봄’이 있었다. 아기는 갓 태어난 새싹처럼 작고 연약했으며, 눈처럼 흰 담요에 감싸여 마치 보호받고 있는 꽃봉오리 같았다. 가느다란 속눈썹이 살짝 떨리며 눈꺼풀이 천천히 열렸고, 크고 맑은 눈동자가 조용한 호기심으로 바라보았다. 작고 오밀조밀한 손가락은 본능적으로 움켜쥐려는 듯 살짝 오므려져 있었고, 연분홍빛 입술이 희미하게 떨렸다. 숨소리는 봄날의 미풍처럼 가볍고 일정하게 흘러나왔다. 두 뺨은 따스한 햇볕을 머금고 부드럽고 생기 넘치는 붉은 기운을 띠고 있었다. 그 작은 존재가, 거친 눈보라가 몰아치는 이 아침에 내 앞에 도착했다. 차가운 계절 속에서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따스한 기적 앞에서, 나는 그저 숨을 멈춘 채 아기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스레 떨리는 손을 내밀어 아기를 안아 들었다. 한껏 움츠러든 작은 몸이 품속에서 서서히 풀리며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아기의 체온은 미묘한 온기를 품고 있었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미약하게 꿈틀거렸다. 아주 작은 생명이 내 품 안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그 순간 문득, 꽃샘추위를 지나 다가올 따뜻한 시간을 미리 알리는 존재, 겨울이 끝나간다는 신호처럼. 어쩌면 봄이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느닷없이, 예고 없이 우리에게 도착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단순한 계절이 아니라 삶 속으로 스며드는 선물처럼, 가장 추운 순간에 불쑥 찾아오는 기적처럼.
아기를 품에 안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그 하얀 세상 속에서도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봄은 눈 속에서도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을. 봄은 기다리는 자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맞이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 아이처럼, 아무런 예고 없이 우리 삶에 도착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슈퍼로 달려가 아기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사서 왔다. 따뜻한 담요, 작은 우유병, 부드러운 면사 포대기까지. 손에 든 비닐봉지가 얼어붙을 듯 차가웠지만, 품에 안긴 작은 존재의 체온은 여전히 따뜻했다.
아기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포근한 담요를 감싸 주었다. 작은 손이 공중을 더듬듯 살짝 움직이다가, 마침내 내 손가락을 단단히 쥐었다. 마치 이 세상에 첫 번째 닻을 내리듯. 미약하지만 분명한 온기가 손끝에서 전해져 왔다. 눈을 감고 있던 아이는 몸을 살짝 움찔하더니, 이내 옅은 숨결을 내쉬었다.
따뜻한 물을 데워 작은 우유병을 준비했다. 미지근한 온도를 맞추기 위해 손등에 살짝 떨어뜨려 보고, 조심스레 아이의 입술 가까이에 가져다 댔다. 처음엔 서툴게 망설이던 작은 입술이 어느 순간 본능적으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미세한 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채우고, 목젖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생의 첫 양분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바깥세상은 여전히 차가운 바람 속에 갇혀 있었지만, 방 안에는 미묘한 변화가 있었다. 한기가 스며들었던 공기는 점차 부드러워졌고,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내 품 안의 작은 존재는 아득한 꿈 속에서 미소를 짓는 듯했다. 아마도 따스한 봄바람이 부는 어느 들판에서 뛰어놀고 있는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이를 돌보는 순간순간이 봄을 맞이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얼어붙은 세상 속에서도 온기를 품고, 기다리고, 보살피는 일. 봄을 불러오는 길이라는 것을.
나는 아기의 손을 살며시 쥐고 속삭였다.
햇살 가득한 아침입니다.
봄아 자장자장
대문사진 출처>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