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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실물센터에서 연락이 왔다.

잃어버렸지만, 잊어버리지 않은

by 적적

분실물센터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바람 한 점 없는 공기처럼 건조했다. 몇 년 전, 잃어버린 사진기를 찾으러 방문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여행 중 사라진 줄도 몰랐던 사진기, 그 속에는 바람이 넘실대던 초원, 금빛으로 반짝이던 파도, 낯선 골목에서 문득 마주친 노인의 미소가 담겨 있었다.


그것을 다시 받아 들던 순간, 잊고 있던 시간이 필름처럼 찰칵찰칵 되감겼다. 그날의 공기, 햇살, 소리마저 다시금 선명해지는 듯했다. 이번에도 그런 기분이 들까? 기대와 불안이 엉켜 손으로 수화기를 꼭 쥐었다.



OOO님 분실하신 물건 확인해 보세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봄을 잊어버렸던 건가 아니, 사실 몇 번이나 무언가를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쉬웠던 것은 사진기였다.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한참을 찾았고, 그동안 찍어 두었던 장면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더 큰 허전함으로 다가왔었다. 기다리는 동안 초조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혹시라도 찾지 못하면 어쩌나, 다시는 그 순간을 담을 수 없으면 어쩌나. 잃어버린 것이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그것에 담긴 시간과 기억이라는 사실이 그때야 뼈저리게 느껴졌다. 봄도 마찬가지였다. 손에 쥘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갑처럼 주머니에 넣어 다니다가 흘린 것도 아닐 텐데. 그러나 최근의 나를 돌아보면, 어쩌면 정말로 봄을 잊어버렸는지도 몰랐다.



바쁘다는 핑계로 계절을 잊고 살았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일과 시간에 쫓겨 창밖을 제대로 내다보지 못했다. 봄이 왔다고 했지만, 내 기억 속 마지막 봄날은 하얀 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따뜻한 바람 대신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얼렸고, 거리는 잿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꽃은 어디에도 피지 않았고, 하늘은 봄이라기엔 너무 무거웠다. 출근길엔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았고, 퇴근길엔 피로에 찌든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거리에서 활짝 핀 개나리를 보며 ‘이제 봄인가?’ 하고 놀라는 내 모습이 당연해졌다.


정말 봄을 잃어버렸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디에 두었는지도 모른 채. 그리고 다행히도, 누군가 그것을 찾아서 분실물센터에 맡겨둔 것이었다. 어떤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조심스레 분실물센터를 찾았다. 데스크에 앉아 있던 직원은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 지루한 듯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나를 보고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은 한없이 무심했고, 눈꺼풀은 무거워 보였다. 깊이 팬 미간은 피로와 무관심이 쌓여 굳어진 흔적 같았고, 입술은 말라 있었다. 그의 시선은 나를 스친 뒤 곧장 화면으로 돌아갔다. 이곳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반복되는 절차 속에서, 그는 그저 익숙한 흐름을 따르고 있을 뿐이었다.



신분증 부탁드립니다.



직원의 목소리는 마치 자동응답기의 음성처럼 일정한 높낮이와 억양을 유지했다. 단 한 치의 감정도 섞이지 않은 채 공기 중에 스며들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 내밀었고, 그는 그것을 받아 들고 화면을 몇 번 두드렸다. 짧은 정적이 흐른 뒤, 그의 눈이 천천히 내 얼굴과 신분증의 사진을 오갔다. 눈썹이 미세하게 일그러지더니, 그마저도 곧 무표정 속으로 스러졌다. 그리고 다시 화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음성처럼, 그의 시선도 그저 의무적인 움직임일 뿐이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편의 선반으로 향했다. 나는 그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선반 위에는 주인을 잃고 먼지를 뒤집어쓴 것들이 무심하게 놓여 있었다. 빛이 바랜 가방은 한때 누군가의 어깨를 감싸고 길 위를 함께 걸었을 것이고, 낡은 우산은 비 오는 날 누군가를 조용히 지켜주었을 것이다. 바랜 표지가 벗겨진 책들은 마지막으로 넘겨졌던 페이지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직원의 손끝이 익숙하게 선반을 더듬었다. 서랍을 여는 순간, 손가락이 아주 미세하게 멈칫했다. 하지만 곧 망설임을 지운 듯, 그는 그것을 집어 들고 천천히 내게 내밀었다.


따뜻한 공기가 손끝을 스칠 때, 머릿속에는 오래전 맞았던 첫 봄바람의 감촉이 되살아났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은 한때 내가 서 있던 들판의 향기를 닮아 있었고, 아이들이 웃으며 뛰어다니는 소리는 어린 시절의 환한 오후를 끌어올렸다. 그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눈앞의 빛은 단순한 색이 아니라, 시간과 감각이 쌓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문득 창밖을 바라보니, 연둣빛 잎이 돋아난 가로수가 서 있었고, 한 아이가 들꽃을 꺾어 손에 들고 있었다.



그렇게 내 곁에 있었다. 다만 내가 그것을 보고 느낄 여유가 없었을 뿐.

나는 분실물센터를 나오며 봄을 두 손에 꼭 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은 쌀쌀한 공기가 옷깃을 스쳤고, 어디에도 꽃은 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거리를 비추는 햇살은 분명 봄이었다.

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빛은 부드러웠고, 사람들 얼굴 위에도 온기가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웃으며 한 걸음 내디뎠다.


다시 찾은 봄을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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