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맛보다 오래 남는 감정의 질감에 관하여
가령, 이런 식인지. 엄마는 고구마를 쪄주신다는 거야 그러자 꼬꼬마 적적은 군고구마가 먹고 싶다고 말한 거야 그건 어떤 의지가 아니라 갑자기 떠오른 발상 같은 거였는데, 엄마는 아빠와 아빠의 조상들과 그리고 박 씨 집안 전체의 고집스러움과 까탈스러움을 들먹이며 안된다고 하셨지.
그리고 꼬꼬마 적적은 군고구마가 아니면 먹지 않을 거라고 선언했어.
엄마는 한참을 망설이다 군고구마를 만들어주셨지만 군고구마가 완성될 동안 먹은 욕으로 군고구마를 반도 먹지 못하고 냉장고 안에 들어가 버렸지.
그리고 오늘 아침 기온은 그 군고구마를 꺼내 조금씩 베어 먹는 것 같아
어느 집의 부엌에서 찜통 속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고구마를 찌는 수증기는 단순한 증기가 아니라, 아주 오래된 기억의 형태로 방 안을 떠다녔다. 고집과 불만, 그리고 입술에 들러붙던 단맛. 그 냄새는 음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구조를 떠올리게 했다. 말 한마디로 뒤틀릴 수 있었고, 또 말 한마디로 돌아올 수도 있었던 시간. 고구마를 찌고 있다는 사실보다, 왜 찌고 있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시절이 있었다. 그러니 누군가는 조심스럽게 군고구마를 말한다. 그것은 배고픔이 아니라, 발상이다. 욕망의 문법은 언제나 논리보다 빠르다.
군고구마는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되지 않는다는 말 몸속에는 하지 않겠다는 뜻과 할 수 없다는 뜻이 섞여 있었다. 부엌에서 고구마가 익어가는 동안, 말은 부풀고, 논리는 단단해지고, 감정은 과거형이 되어간다. “안 돼”라는 말에는 언제나 어딘가 다른 시간의 고집이 묻어 있다. 박 씨 집안의 성정이나 아버지의 목소리, 말없이 흘러나오는 계보 같은 것. 사라지지 않는 의지와 사라지지 않는 방법들이 대화의 뒤편에서 움직인다. 그래서 ‘되지 않음’은 하나의 전통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고집은 언제나 대안을 불러온다. ‘그렇다면 먹지 않겠다’라는 선언은 실제로는 식욕과 상관이 없고, 자존감과도 다르며, 오직 한 가지 감정으로부터 발생한다. ‘나도 말할 수 있다’는 그 감각. 그것은 말보다 먼저 생겨나는 무언가다. 언어가 주체를 갖기 전에, 감정이 공간을 장악한다. 누군가는 군고구마가 먹고 싶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원함’이라기보다 ‘필요함’이었다. 고집은 바람이 아니라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어느 집안의 성질이든, 유전의 방식이든, 결국 그것은 고구마 하나를 굽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작동한다.
군고구마는 결국 만들어졌다. 전리품은 승리의 결과가 아니었다. 만들어지는 동안 부엌에 쌓인 말들이 그 표면에 엉겨 붙었다. 찜기가 아닌 오븐에서, 혹은 숯불 위에서 익은 것이 아니라, 냉담한 말들과 짧은 한숨, 그리고 뒤돌아서는 몸짓들 사이에서 익었다. 그러니 먹을 수는 있지만, 삼킬 수는 없는 음식이 된다. 혀에 얹은 단맛과 귀에 맴도는 말이 함께 씹힌다. 군고구마는 식탁 위에 놓이지만, 그것은 다정함이 아니라 양보의 결과로 놓인다. 말하자면, 온도가 아니라 감정의 질감으로 완성된 음식이다.
결국 반도 먹지 못한 채, 군고구마는 냉장고 안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누군가의 입맛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관계의 온도가 식었다는 뜻이다. 냉장고 안에서 식어가는 고구마는 음식이 아니라, 한 시절의 메모처럼 보관된다. 먹지 못한 것과 하지 못한 것 사이에는 언제나 무언가가 남는다. 그것은 잊히지 않기 때문에 냉장고에 넣는 것이고, 다시 데워 먹을 수 없기 때문에 넣는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보존이 아니라 포기다. 감정은 식는 것이 아니라, 고여버리는 것이다.
아침이 되었다. 창문을 열자, 기온이 입속으로 스며든다. 오늘 아침의 기온은 그 군고구마를 꺼내어 조금씩 베어 먹는 느낌이다. 차갑고, 말랑하며, 오래된 설탕 같은 감촉. 식은 음식처럼, 식은 감정은 부드럽고 끈적하다. 먹고 싶지는 않지만, 먹지 않을 수도 없는 것. 그것은 의식의 문제라기보다 생존의 양식에 가깝다. 하루를 시작한다는 건 결국 식어버린 어떤 감정을 다시 입에 넣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쩌면 이 계절이 자꾸만 길어지는 이유일 수도 있다.
늦봄의 꼬리가 길다. 날은 분명 따뜻하지만, 그 안에 뭔가가 식어 있다. 한 번도 타오른 적 없었던 것처럼, 혹은 이미 다 탔다고 믿었지만 꺼지지 않았던 무언가처럼. 계절은 끝나지 않았고, 끝나지 않기 때문에 이다지도 오래 남는다. 창가에 남은 바람의 흔적, 냉장고 안의 군고구마, 찜기 속에 피어오르던 김의 기억. 그 모든 것들이 이제 감정이 되어버린 시간. 그러니 계절을 기억하는 방법은 결국 누군가와 나눈 대화 속에 있다.
시간은 음식을 닮아 있다. 익는 시간이 있고, 식는 시간이 있고, 먹지 못한 채 버려지는 시간이 있다. 때때로 그 모든 시간이 한 끼 안에 녹아 있다. 늦봄이 길어진다는 말은 사실 계절이 미뤄졌다는 뜻이 아니라, 그 계절 속에 남은 무언가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사라지지 않은 감정, 다하지 못한 말, 익지 못한 고구마. 그것들이 계절을 질질 끌고 있다. 어느 아침, 식은 군고구마를 꺼내어 베어 무는 그 찰나, 다시 봄이 시작될 수도 있다. 아니면, 끝나지 않은 채 다음 계절로 밀려날 수도 있다.
늦봄은 고집스럽고, 까탈스럽고, 설명할 수 없다. 마치 말끝마다 조상들의 그림자가 따라붙는 대화처럼. 결국 그 모든 건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단지, 조금씩 베어 먹는 것처럼 지나갈 뿐이다. 지금,
그 꼬리가 입 안에 남아 있다.
사진 출처>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