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열라 섹시해지고 싶어
거울 앞에서 입꼬리가 올라가면 그건 거의 반사에 가깝다. 고양이가 앞발을 핥듯이, 무의식에 가까운 속도로, 실재보다 더 실재처럼 비치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넨다. 이마를 매만지고, 뺨의 곡선을 조명 아래서 기울여 본다. 옷깃을 잡아당기고, 쇄골과 턱선 사이를 이어 붙이듯 눈길을 던진다. 그 모든 동작의 이름은 하나다. 섹시함.
그 단어는 늘 물음표를 달고 온다. 무엇이 섹시한가. 언제 섹시해지는가. 누구에게 섹시하고 싶은가. 대답은 대부분 비어 있거나 모호하거나, 거짓말에 가깝다. 누군가를 유혹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증명하고 싶어서. 삶의 어떤 순간, 한없이 왜소해졌던 시간의 반동처럼, 섹시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튀어나온다. 비단 피부의 온도나 입술의 곡선만은 아니다. 존재의 어떤 윤곽. 말하지 않아도 흘러나오는 긴장과 리듬. 웃지 않아도 눈매에 감도는 어떤 스토리. 그것을 가지면 모든 것이 견딜 만해질 것 같았다.
섹시해진다는 건 자신을 발화하는 방식의 변주다. 몸짓, 언어, 표정, 침묵의 타이밍. 그것들은 단지 물리적인 제스처가 아니라, 기어코 세계를 꿰뚫고자 하는 의지의 외피다. 말의 끝을 흐릴 줄 아는 사람. 어휘의 무게를 안쪽에서 다루는 사람. 사라지는 사람. 그런 사람이 섹시하다. 어쩌면 가장 강한 존재는 끝까지 보여주지 않는 자다. 오롯이 정체불명의 공간을 남기는 사람. 그 안을 채우는 건 언제나 타인의 상상이다. 섹시함은 그래서 침묵 속에서 태어난다.
어떤 얼굴은 빛에 닿을 때마다 형태가 바뀐다. 전면이 아니라, 그림자 속에서 피어나는 선. 그 음영의 여백이 타인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섹시함은, 그런 틈에서 자란다. 노출이 아니라, 단속. 과시가 아니라, 제어. 어딘가 감춰져 있고, 동시에 발각되기를 바라는 이중성. ‘드러냄의 미학’이 아니라 ‘숨김의 기술’. 유혹은 결국 미지에의 탐험이다. 완전한 정보 앞에서는 갈망도 사라진다. 섹시하다는 건, 그래서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걸음을 본다. 누구는 빠르고, 누구는 뜸하게 걷는다. 어떤 이는 허공을 끌고 다니고, 누군가는 땅을 밀며 나아간다. 몸의 리듬에서 세계관이 읽힌다. 자기 자신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움직임도 달라진다. 그래서 몸이야말로 철학이다. 단단한 신념이 있는 사람의 발걸음은 말보다 설득력 있다. 가볍지만 무게 있는 걸음. 그 느린 리듬. 그 완급 조절. 그런 것들이 모여 섹시해진다.
섹시해지고 싶다는 건, 결국 삶을 지탱할 단어 하나가 절실하다는 의미다. 어떤 날은 존재의 경계가 너무 흐릿해져서, 자신을 설명할 언어가 보이지 않는다. 무능력. 무기력. 무관심. 무감동. 그 무(無)들의 연속 속에서, 하나의 생생한 욕망이 돋아난다. 섹시함이라는 이름의 고백. 그것은 비명을 참는 방식이고, 침묵을 무너뜨리는 절제이며, 무너짐의 의연함이다. 흔들리되 무너지지 않는 어떤 중심. 소리 없이 존재를 재확인하는 감각.
어떤 사람은 고백하지 않는다. 대신 잘 접힌 셔츠를 입고 나타난다. 어떤 이는 웃지 않는다. 대신 눈빛이 방 안의 공기를 바꾼다. 말을 줄이고 대신 침묵을 남긴다. 이때 침묵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음이 아니라, 모든 것을 말하고도 남은 뒤의 상태다. 섹시하다는 건 그래서, 충만함의 다른 말이다. 무엇인가를 가득 품고 있는 상태. 반드시 드러낼 필요 없는, 이미 차오른 것. 그렇기에 더 많은 것을 상상하게 만드는 것.
누군가를 좋아할 때, 가장 먼저 달라지는 건 말투다. 그리고 시선의 속도. 눈을 얼마나 오래 머무는가. 손끝이 몇 밀리초 더 느려지는가. 그것들은 모든 기술을 무력화시키는, 본능의 미세 조정이다. 섹시해지고 싶다는 마음은 결국, 그 조율의 가능성을 되찾고 싶다는 뜻이다. 살아 있다는 걸 확인받고 싶은 욕망. 투명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지나치지 않기 위해. 배제되지 않기 위해. 다시 느려지고 싶다는 갈망.
스크린 위 배우들이 담배를 피운다. 연기는 천천히 허공을 가른다. 손가락과 입술 사이, 불빛과 그림자 사이, 그 어디쯤에서 삶이 멈춰 있다. 그 멈춤의 순간에, 어떤 절실함이 숨는다. 섹시하다는 건 정지된 순간에 깃든 집중이다. 모두가 지나가고 있을 때 혼자 멈춰 있는 사람. 모두가 소란을 피울 때 유일하게 침묵하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서, 눈을 뗄 수 없다.
섹시함은 모든 힘을 축소시키는 능력이다. 단단한 것을 부드럽게 만드는 기술. 투쟁을 시처럼 바꾸는 태도. 가장 비루한 순간에도 스스로를 무너지지 않게 붙들고 있는 의식의 방식. 그래서 이 욕망은 생존을 닮았다. 누추해지지 않기 위한, 하나의 유일한 무기처럼. 살기 위해 유혹하는 존재. 죽지 않기 위해 매혹을 끌어당기는 기술. 그것은 도발이 아니라 방어다.
밤이 깊을수록 창문은 더 투명해진다. 바깥의 불빛이 안으로 들어온다. 안쪽의 실루엣은 바깥으로 비친다. 그 겹침. 그 뒤섞임. 그 투과성. 섹시하다는 것은 결국, 경계를 부드럽게 하는 감각이다. 명확함과 모호함 사이, 보여짐과 숨겨짐 사이, 욕망과 절제가 엇갈리는 그 경계에서, 인간은 가장 생생해진다. 그 선 위에 오래 서 있을 수 있는 자만이, 섹시해질 수 있다.
지금도 누군가는 섹시해지고 싶다. 그것은 변덕이 아니라 간절함이다. 더 단단해지고 싶다는 욕망. 더 가벼워지고 싶다는 의지. 더 선명해지고 싶다는 선언. 무엇보다 잊히지 않기 위해. 사라지지 않기 위해. 지워지지 않기 위해. 섹시해지고 싶다는 말은, 삶의 가장 깊은 부분을 말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침묵하는 방식의 울음. 걷고 있는 형태의 비명.
그러니까,
나는 자꾸만,
섹시해지고 싶어.
섹시해지고 싶다는 건 결국 나를 잃지 않겠다는 뜻이다. 부서지지 않기 위해, 무너지지 않기 위해, 무의미 속에 침잠하지 않기 위해. 존재를 빛나게 하는 건 언제나 절제된 욕망이다. 침묵 속에 깃든 웅변, 느린 걸음에 감긴 결심, 노출보다 깊은 응시. 그 모든 것들이 모여 하나의 실루엣을 만든다. 단어로 설명되지 않는, 그러나 모든 감각이 반응하는 무언가.
섹시함은 본능이 아니라 언어 이전의 감각이며, 그 감각은 끝내 나를 세계로부터 분리시키지 않는다. 외면이 아닌 내면의 조율로, 몸이 아닌 태도로, 시선이 아닌 존재 전체로 발화되는 언어. 결국 가장 섹시한 존재는, 세계의 소음 앞에서 조용히 중심을 지키는 자다. 흔들리지만 무너지지 않고, 사라지되 지워지지 않는 사람. 지금도 어딘가에서, 어떤 이는 그 침묵 속에서 발화되고 있다. 사라지지 않기 위해. 투명해지지 않기 위해. 다시, 나를 입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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