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위로하지 않고 해체하는 법
위로라는 단어가 도시 어딘가에서 간판처럼 흔들리고 있다. 카페, 심리상담소, 소셜미디어 피드, 낙서처럼 적힌 ‘괜찮아, 다 잘 될 거야’라는 문장들. 그것은 정지된 위로다. 건드려도 흔들리지 않고, 댄스로 재해석되지도 않는, 그래서 불완전하게 오래 남아 있는 위로. 과연 그런 위로는 시간을 통과할 수 있을까. 위로가 시간과 정서를 함께 관통하려면 능동적인 구조여야만 한다. 위로는 타인의 슬픔에 기생하지 않고, 자신의 행위로 타인의 고통을 무너뜨리는 동사여야 한다.
누군가는 그 위로의 정의를 잘못 읽는다. 말보다는 정적이, 다정함보다는 침묵이, 때로는 배려보다는 뻔뻔함이 더 크고 깊게 도달하는 경우도 있다. 위로는 맹렬한 속도로 진행될 때 비로소 ‘치유’로 진화한다. 치유라는 단어의 안쪽엔 위로의 칼날이 있다. 무엇이든 치유되기 위해선 자르거나 파내야 하는 절차가 선행되기 때문이다. 위로는 결코 부드러운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정반대의 얼굴로 등장해 스스로를 해체시킨다.
무기력한 위로는 산소가 빠진 풍선처럼 벽을 따라 구르다가 결국 무의미에 머무른다. 그러나 능동적인 위로는 사람의 등을 때리고, 때로는 문을 닫고, 식탁 위에 칼을 놓는 행위다. 그것은 어떤 극단으로서의 위로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큰 울림을 주는 무언의 언어. 능동적인 위로는 분명하고 날카롭다. 듣는 이에게 깊게 박히고, 감정을 해체시킨다. 그리고 그렇게 해체된 감정은 낯선 이질감을 통과해 새로운 감정의 방에 도달한다.
고통은 고요하다. 위로는 시끄럽다. 고통은 방 안에 갇히고, 위로는 그 방을 부순다. 능동적인 위로는 타인의 감정을 대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만 가능한 감정의 수행이다. 그것은 기계적인 공감이 아니다. 오히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슬픔을 기각한다. 예컨대 연인과 이별한 사람 앞에서 "잘됐다, 이제 자유네"라고 말하는 무례한 친구의 말이 오히려 진짜 위로가 되는 경우처럼. 그 말은 이별이란 고통에 권위를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고통을 상대화시킨다. 그리고 상대화된 고통은 더 이상 절대적인 무게를 갖지 않는다.
위로는 때로 농담처럼 들리고, 때로 모욕처럼 보이며, 심지어 공격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위로는 감정의 깊이를 예리하게 겨냥하고 있다. 감정은 언제나 예측 가능하지 않은 방식으로 구조되기 때문이다. 능동적인 위로는 그 예측 불가능성을 통과하며, 감정의 신경말단에 도달한다.
도시의 밤은 그 위로의 장소가 된다. 누군가는 지하철 2호선 마지막 칸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누군가는 편의점 안쪽 냉장고 앞에서 무작위로 캔맥주를 고른다. 거기엔 ‘일상’이라는 이름의 위로가 있다. 익숙한 일상의 반복이 사람을 안심시키고, 결국 감정을 봉합한다. 그러나 그 또한 단지 ‘습관’에 지나지 않는다면 위로가 아니다. 반복은 위로가 아니다. 능동적인 반복만이 위로가 될 수 있다. 즉, 선택된 일상, 자발적인 루틴, 자각된 움직임만이 사람을 감정의 늪에서 건져 올린다.
감정은 언제나 예외적이다. 그래서 위로도 늘 예외적이다. 정형화된 위로는 패턴화 된 감정을 상정할 때만 작동한다. 하지만 감정은 거의 언제나 비정형적으로 발생하고, 예상과 어긋난다. 슬픔은 기쁜 일 사이에서 틈입하고, 공허는 사랑의 절정에서 터지며, 우울은 웃음의 잔해에서 흘러나온다. 능동적인 위로는 이처럼 비정형적인 감정의 순서를 읽는다. 그리고 그 감정이 발생한 문맥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위로는 감정을 어루만지지 않고, 해체한다.
책방 한켠에 자리한 오래된 의자, 인테리어로 남겨진 타자기, 누군가의 외투, 냄새, 구겨진 종이컵. 이 모든 것은 위로의 잔재다. 과거의 감정이 스며들어 있는 오브제. 그러나 능동적인 위로는 물건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움직임 속에 있다. 걸어가는 사람, 눈을 피하는 사람, 입술을 깨무는 사람, 고개를 돌리는 사람. 이런 사람들의 행위 속에서만 위로는 비로소 자신의 실체를 드러낸다. 위로는 행위다. 정서는 대상이 아니라 사건이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고 존재하는 위로는 없으며, 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위로는 더더욱 없다. 능동적인 위로는 반드시 타인에게 닿아야 한다. 닿기 위해 자신을 변형시키고, 형태를 바꾸며, 언어의 물리적인 구조조차 재배열한다. 누군가의 삶을 지켜내기 위해선 도무지 위로 같지 않은 위로가 필요하다. 따뜻하지 않은 말, 정중하지 않은 시선, 미안하지 않은 침묵. 그런 것들이야말로 진짜 위로가 된다.
한밤의 라디오에서 울려 퍼지는 낡은 재즈, 빗방울에 찢겨 나가는 포스터, 엘리베이터 안에서 스쳐 지나가는 옷깃, 지나가던 사람이 흘린 짧은 한숨. 그 모든 사소함 속에서 위로는 출현한다. 그러나 위로는 항상 ‘우연’의 탈을 쓰고 있지만, 실은 가장 치밀한 설계의 감정이다. 우연처럼 보이는 위로는 사실상 극도로 능동적인 개입이다. 고통의 문맥을 조심스럽게 읽고, 그 맥락에 균열을 내는 방식. 그것이 진짜 위로다.
고통은 정체되어 있고, 위로는 진행된다. 고통은 멈추지만, 위로는 확장된다. 능동적인 위로는 고통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자리에서 스스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일어선 감정은 고통의 외피를 벗고, 새로운 의미의 영역으로 옮겨간다. 위로는 끝내 감정을 재정의한다.
무엇이 고통인지조차 알 수 없는 시대다. 감정은 도식화되고, 표정은 필터 속에서만 살아남는다. 슬픔조차 연출의 대상이 되고, 공감도 대본처럼 흘러간다. 그 안에서 위로는 살아남기 어렵다. 능동적인 위로만이 이 시대의 가면을 벗긴다. 무표정한 공감, 기계적인 안부, 반복되는 위선에 저항하기 위해선, 감정의 진폭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 위로가 필요하다.
위로는 울음을 멈추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울음을 증폭시킨다. 더 깊이 울게 하고, 더 정직하게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 후에야 진짜 감정이, 진짜 언어가, 진짜 인간이 남는다. 위로는 본질적으로 ‘남기는’ 감정이 아니라 ‘드러내는’ 감정이다. 감정을 끝내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틈을 드러냄으로써 인간을 투명하게 만든다. 능동적인 위로는 그래서 결국 인간을 ‘보이게’ 한다.
세상은 여전히 아프다. 도시는 아픈 사람을 밀어내고, 감정은 공공장소에서 자리를 잃는다. 그러나 위로는 그 모든 외면의 반대편에서 시작된다. 거리의 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는 손, 전철역을 빠져나오는 발, 옥상에서 흘러나온 라디오 소리. 그런 세세한 감각들이 감정을 구조한다.
지극히 능동적인 위로란 결국 누군가의 손을 잡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손을 내미는 것이다. 말해달라고 요구하지 않는 말, 안아달라고 요청하지 않는 팔, 미안해하지 않는 이마. 능동적인 위로는 그 어떤 요청 없이도 존재하는 감정의 본능이다. 그것은 생존의 기술이며, 인간됨의 기예다.
마침내 위로는 말이 아닌 사건이 된다. 능동적인 위로는 누군가의 하루를 바꾼다. 눈앞의 삶을, 다시 시작하게 만든다. 비로소 인간은 감정이라는 미로에서 빠져나오고, 감정이 아닌 삶이라는 사건 안으로 들어선다. 위로는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마지막 장치다. 고통을 통과한 감정, 그리고 감정을 통과한 인간. 그곳에서 위로는 더 이상 설명되지 않는다. 단지 존재한다. 묵묵히, 그리고 치명적으로.
위로는 한 문장의 문법이 아니라, 존재의 무게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닿기 위해 언어의 모서리를 다듬는 행위가 아니라, 침묵의 깊이를 더듬어 나가는 감정의 리듬이다. 슬픔은 그저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한 세계를 통과하는 방식으로, 어떤 존재의 양태로 도달한다. 위로는 그 슬픔의 결을 따라 흘러 들어가면서도 결코 섞이지 않는다. 마치 타인의 꿈속에 잠시 들렀다가, 아무것도 훼손하지 않고 빠져나오는 손님처럼. 혹은 오래된 피아노 건반 위에서 한 음을 짚고 떠나는 지문처럼.
능동적인 위로란 결국 감정의 불확실성을 통과하는 철학적 고집에 가깝다. 그것은 온도의 문제라기보다는 거리의 문제이고, 진심의 크기가 아니라 그 진심이 머무는 시간의 밀도다. 가끔은 말보다 먼 시선이, 눈빛보다 오래된 침묵이, 따뜻한 손보다 차가운 무관심이 더 근원적인 위로가 된다. 어쩌면 진짜 위로는 감정을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살아 있게 만드는 일인지도 모른다. 위로는 잊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정돈하는 일이다. 더 이상 고통이 주인공이 아닌 자리에 앉도록 조용히 배치해 주는 일이다.
한 사람의 하루는 언제나 쓸쓸하게 흐른다. 택배 상자를 뜯는 손끝, 식탁에 부딪히는 컵의 소리, 창문 너머 아득히 멀어지는 자동차 불빛. 그 모든 사소한 장면 속에 감정은 반복되고, 감정이 반복되는 방식으로 세계는 지속된다. 위로는 그 반복 안에서 아주 미세한 어긋남으로 존재한다. 마치 한 치만 어긋난 리듬이 음악을 낯설게 만들 듯, 위로는 일상을 낯설게 함으로써 감정을 다시 숨 쉬게 만든다. 그것이 지극히 능동적인 위로의 본질이다. 사랑도 아니고, 구원도 아니고, 단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가장 투명한 개입.
인간은 언제나 늦게 도착하는 위로에 의해 구원받는다. 위로는 정시에 도착하지 않는다. 감정이 다 흘러내리고, 시간의 결이 바래지고,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질감으로만 남았을 때, 그제야 위로는 비로소, 어떤 형태로든 도착한다. 그것은 다시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게 되는 어떤 저녁이고, 울지 않아도 슬픔을 기억할 수 있게 되는 하나의 밤이며, 무언가를 용서하지 않고도 용서와 비슷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되는 이른 새벽이다. 위로는 설명할 수 없고, 기억할 수도 없다.
그것은 다만, 언젠가 어떤 고요한 순간, 스스로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게 만드는 순간에만.
완전히 도착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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