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사 finale

투명한 문장의 진동들

by 적적

감각을 지나 언어로 굴절되는 세계의 단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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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은 직선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그 직진은 실은 오해에서 비롯된다. 무언가에 부딪히지 않는 한, 혹은 굴절되지 않는 한, 빛의 존재는 감지되지 않는다. 투명한 공간 속에서 빛은 무색이다. 단지 표면에서, 그리고 입자에서, 끝내 도달한 반사에서만 색은 발생한다. 묘사도 그렇다. 어떤 세계든, 문장이라는 투명한 빛이 닿을 때에만 거기 색이 생긴다.


묘사는 보기의 기술이 아니다. 보는 법은 그 자체로 거의 본능적인 작용이다. 아이도 본다. 동물도 본다. 하지만 보는 것과 느끼는 것, 그리고 그것을 다시 빛처럼 분해해 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작동 방식이다. 묘사는 현상을 감각으로 번역하고, 감각을 언어로 다시 환산한다. 그 사이에는 고통이 있다. 혹은 지나친 명료함에 대한 의심. 그 의심이 없는 묘사는 흔히 감탄으로 빠진다. 반짝인다. 하지만 깊이는 없다.



모든 묘사는 색의 이름을 빌려온다. 색은 감정의 근삿값이다. 코발트블루는 담담한 체념을, 올리브는 우울의 피로를, 검붉은 자주색은 수치스러운 열망을 의미한다. 색을 말하면서 색이 아닌 것을 표현하고자 할 때, 언어는 자신의 바깥에서 제 기능을 발휘한다. 그것은 이상한 구조물, 곧 무너질 듯 버티는 외팔보다. 색이라는 단어로 감정을 걸쳐 입는다. 묘사는 그래서 정직하지 않다. 정확하지만, 정직하지 않다.


빛이 파장을 가지듯, 묘사에도 주파수가 있다. 감정의 높은 진폭, 미세한 표정의 떨림, 말끝에 남은 고요한 정적. 그것은 물리적인 진동으로는 포착되지 않는다. 손톱 끝의 굴곡, 깎이지 않은 발꿈치의 묵은 각질, 벽에 박힌 못 하나에서부터 시작되는 시간이 있다. 그런 것을 감지하는 사람만이 묘사의 고막을 가진다. 모든 감각기관은 퇴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했지만, 언어는 거기에 저항했다. 말은 사라지기 위해 쓰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말은 살아남기 위해 묘사를 부른다. 파장이 없는 언어는 곧 잊힌다.



표면을 보고도 내부를 말하는 것, 그것이 묘사다. 고양이의 등을 타고 흐르는 털의 결에서, 오래전에 죽은 사람의 한숨 같은 것을 발견할 수도 있다. 도시는 늘 제 몸을 감추고 있다. 그 표면은 유리로 되어 있고, 유리에는 빛이 닿는다. 유리에 닿은 빛은 반사되어 도로를 데운다. 아스팔트는 그래서 늦여름의 모든 기억을 저장하고 있다. 그것을 말하는 일은 어려운 방식의 묘사다. 여름날 도시의 아스팔트가 품고 있는 것은 단순한 열이 아니라, 열과 섞인 잊힘이다. 어떤 이들은 그 열기를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불능이야말로 묘사의 첫 문장이다.


묘사는 숨는다. 드러나려는 묘사는 선전이다. 그리고 선전은 묘사의 가장 나쁜 유사품이다. 묘사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나치게 존재한다. 너무 확실하여 말할 수 없는 것들. 생의 끝에서 한 사람이 본 햇빛이나, 부재의 기척을 남긴 의자의 곡선 같은 것들. 그것은 지나치게 명확하다. 그래서 쓸 수 없다. 빛이 강하면 상이 맺히지 않는다. 묘사는 밝음과 어두움 사이, 그중에서도 가장 부서지기 쉬운 구간에 머문다. 거기에서 파장은 시작된다.



문장은 파장을 흉내 낸다. 짧게 끊기는 호흡은 공기의 진동처럼 다가오고, 길게 늘어지는 구절은 유영하는 빛처럼 감싸듯 퍼진다. 리듬이 없는 문장은 묘사가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나열이다. 말은 멈추지 않기 위해 길이를 조절하고, 파장을 다듬는다. 묘사의 밀도는 단어의 개수가 아니라 리듬에 따라 측정된다. 좋은 묘사는 결국 하나의 박동이다.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발걸음, 혹은 문득 다가온 어떤 냄새처럼. 묘사된 사물은 갑자기 내면화된다. 그것은 충돌이다. 읽는 것이 아니라 맞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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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 이라는 이름의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어요. 훔치고 싶은 문장을 파는 가게를 운영 중입니다. 프로필은 당신과 나 사이엔 너무 긴 설명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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