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는 감정의 보존창치다.
열은 두 개의 몸 사이에 존재하는 물리학의 사건이 아니라, 언제나 한 쪽이 다른 쪽을 간절히 기억할 때 생기는 편향된 현상이다. 그것은 포옹의 후유증이고, 손끝에 남은 감각의 환영이며, 벽지를 타고 퍼지는 체취의 착각이다. 어떤 거리들은 가까이 있을 때는 보이지 않는다. 너무 가까워서 오히려 가늠되지 않는 거리들이 있다. 그 거리들이, 이따금 관계의 모든 본질이 된다.
서로를 밀쳐내며 끝났던 연인들이 있다. 그들은 마지막이었지만, 그 끝이 곧 정답일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고, 다른 사람의 체온을 새로이 배운 어느 밤, 전 연인의 손가락 모양을 닮은 전구 스위치를 무심코 켜는 순간, 사라진 줄 알았던 감각이 되살아난다. 떨어져 있음으로써 다시 살아나는 기억은 그것이 완전히 사라진 적 없었음을 말해준다. 사랑은 죽지 않고 단지, 먼지처럼 가라앉아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사랑은 때로 침묵 속에서 더 오래 지속된다. 말이 없기에 무너지지 않는 관계가 존재하고, 침묵이 있었기에 무너지지 않고 흘러가는 시간들이 있다. 말이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침묵을 예의처럼 지킨다. 그 예의는 오히려 더 깊은 속박을 만들어낸다. 거리두기는 해방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얽힘이다.
에로스는 육체의 융합이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가에 대한 불안이다. 그것은 욕망의 정점에서 시작되기보다, 오히려 욕망을 억누른 이후의 긴장에서 발산된다. 손목 하나를 잡지 않은 채로 며칠을 걸어다닌 기억, 술에 취한 사람의 어깨를 빌려주고도 아무 말 없이 집으로 돌아간 밤, 그 모든 것들이 침묵의 에로티시즘으로 남는다. 거리는 욕망을 파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보존한다.
어떤 관계는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계속된다. 접촉하지 않았기에 육체를 초월하고, 끝나지 않았기에 시간이 그 안에 멈춘다. ‘사귀었다’는 말로 지워지지 않는 감정들이 있고, ‘끝났다’는 선언으로 무효화되지 않는 흔적들이 있다. 멀어진 뒤에야 가까움이 선명해지는 이유는, 거리 속에서 인간은 처음으로 시야를 확보하기 때문이다. 가까울 때는 눈이 아니라 감각으로 상대를 인식한다. 멀어져야만 눈으로 본다. 인간의 감정은 늘 뒤늦게 도착한다.
사랑이란 본래 불균형한 거리에서 발생하는 오해의 집합체다. 한쪽은 다다랐다고 믿고, 다른 쪽은 아직 출발하지 않았다고 느낀다. 이 불균형은 에로스의 온도를 높인다. 불균형한 사랑은 늘 더 오래 기억되고, 더 깊게 각인된다. 한쪽만 목말랐던 밤, 한쪽만 먼저 돌아섰던 계단, 그 비대칭의 순간들이 되려 사랑의 본질을 환히 비춘다. 정돈된 사랑은 쉽게 잊힌다. 뒤틀린 사랑은 오래 남는다.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모든 고통의 원인은 아니다. 진짜 고통은, 그 거리를 원한 쪽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벌어진 거리에서 비롯된다. 거리란 원래 비자발적이다. 자발적으로 멀어지는 사람은 기억하지 않는다. 기억하는 쪽은 늘 남겨진 쪽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냉정하지 못하다. 에로틱하다. 어떤 이는 기억으로 흥분한다.
육체의 접촉보다 기억의 접촉이 더 강렬한 에로스를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침대 위의 알몸보다, 벽 너머의 숨소리가 더 야하게 느껴질 수 있다. 눈앞에 있는 사랑보다, 지나간 사랑이 더 매혹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다. 감정은 현실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상상 속에서 완성된다. 그리고 상상은 언제나, 떨어져 있을 때 더 정밀해진다.
한때 같이 살았던 연인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을 때, 그 둘 사이에 놓이는 것은 침묵과 거리뿐이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욕망이었음을 확신하게 된다. 멀어짐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방식의 욕망 표현이다. 가까이 있는 동안은 욕망의 진짜 형태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뒤돌아보는 시간 속에서 드러난다. 연인의 손목을 매만지던 순간이 아니라, 그 손목이 사라진 후 손목의 부재를 감각하는 순간에야 욕망의 실체가 발현된다.
오래된 구두처럼 기억은 각자의 발 모양에 맞춰져 있다. 어떤 이는 같은 순간을 두고 ‘잔혹했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가장 따뜻했다’고 말한다. 관계의 기억은 대칭이 아니다. 그리고 그 비대칭성은 때로 감정의 진실을 더 또렷하게 보여준다. 한쪽이 아직도 그리워할 때, 다른 쪽은 완전히 잊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그리움이야말로, 가장 적나라한 에로티시즘이다. 잊은 자는 멀어졌지만, 그리워하는 자는 여전히 가까이 있다. 실제 거리보다 기억 속의 거리가 더 현실에 가깝다.
육체는 감정을 담는 그릇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그릇은 투명해진다. 감정은 더 이상 살과 살 사이에서 증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부재와 간극 속에서 더 날카롭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부재는 언제나 감정의 증거다. 존재하지 않기에, 강하게 느껴진다. 멀어졌기에, 오히려 가까웠음을 깨닫게 된다.
진짜 거리는 물리적 공간에 있지 않다. 진짜 거리는 감정의 진폭과 상상의 거리, 그리고 침묵의 길이에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잊기 위해 멀리 떠나는 것은 무의미하다. 욕망은 지리적 거리에서 약화되지 않는다. 오히려 심화된다. 거리가 욕망을 죽이지 않는다. 거리가 욕망을 길들인다.
그리움은 가까움의 환영이다. 그것은 완전히 떨어져 보아야만 드러나는 감정이다. 눈앞에 있을 때는 너무 흔해서 소중하지 않다. 떠난 후에야 비로소 그것이 얼마나 가까이 있었는지를 자각한다. 사랑은 결코 눈앞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언제나 한참 떨어진 후, 뒤돌아보는 시간 속에서만 완성된다.
사랑이 끝났다고 느끼는 바로 그 순간, 사실 사랑은 가장 깊어진다. 끝났다고 말하는 사람은 사랑을 마무리했을지 모르지만, 그 순간에도 누군가는 여전히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항상 끝나지 않는 쪽에서 지속된다. 그것이 에로스의 잔혹함이다. 욕망은 짝이 맞을 때가 아니라, 어긋날 때 증폭된다. 그래서 진짜 사랑은 완성보다 부재 속에서 더 뚜렷하다.
멀리 떨어져보면 알게 된다. 얼마나 가까웠는지를. 그리고 그 가까움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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