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미묘케 08화

그대를 어디로 데려갈지 알 순 없지만....

마침표 이후에 가장 먼 여행지

by 적적

문장은 종종 길을 잃는다. 시작은 분명했으나, 끝은 흐릿해지고, 종착지는 지도 위에 없는 골목처럼 나타난다. 길 잃은 문장은 버려지거나, 다시 꺼내져 다른 이야기의 심장 속에 이식된다. 그러면 그 문장은 원래의 주인을 잊고, 새로운 몸에서 박동하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그 문장을 읽으며 오래전 잃어버린 계절을 떠올린다. 그 계절 속에서 이미 사라진 사람의 목소리가 문장 사이로 스며든다.


언어는 종종 예고 없이 낯선 곳으로 데려간다. 돌계단을 밟는 발끝의 차가움, 붉게 칠한 문틀에 얇게 쌓인 먼지, 비에 젖은 흙냄새가 갑자기 감각 속으로 들어온다. 페이지 위의 활자 배열은 시각의 차원을 넘어 촉각과 후각, 때로는 더 깊은 층위로 침투한다. 그건 읽는 이가 준비했거나 원했던 여행이 아니다. 그저 문장이 먼저 손을 뻗어 끌어간다.



어떤 문장은 기억 속 풍경을 변형시킨다. 분명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장소인데, 왜인지 이미 다녀온 것 같은 착각이 생긴다. 언어는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세계를 만든다. 문장의 질감이 두껍고 선명할수록 그 세계의 중력은 강해진다. 그 중력은 조용히, 그러나 돌이킬 수 없이 독자를 끌어당긴다.


문장은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한참을 읽어도 결말이 흐릿해지고, 의미가 완전히 닫히지 않는다. 그런 문장은 독자의 손 안에서 계속 살아 움직인다. 활자 속에 갇히지 않고, 읽은 후에도 마음속에서 다른 형태로 번식한다. 오히려 미완성의 문장이 더 오래 남는다. 완결은 모든 가능성을 닫아버리지만, 결핍은 여지를 남긴다.



읽는 이는 문장 속 인물과 같은 시간을 살지 않는다. 활자 속에서는 봄이지만, 책상 위 시계는 한밤을 가리킨다. 문장은 시간의 흐름을 바꾸고, 감각의 순서를 재배치한다. 겨울밤 창문 틈새로 스며드는 바람 속에서, 한 문장이 한여름 바다의 습기를 불러온다. 그 온도차 속에서 심장은 묘한 박자를 친다.


문장은 위험하다. 너무 깊이 읽힌 문장은 독자의 세계관을 조용히, 그러나 치명적으로 뒤틀 수 있다. 그 뒤틀림은 서서히 퍼져서, 일상의 틈에서 발현된다. 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던 장면이 문장 속 묘사와 겹쳐진다. 마치 소설 속 인물이 현실에 잠시 나타난 것처럼. 이 침투는 되돌릴 수 없다. 한 번 읽힌 문장은 내부 구조를 바꾸고, 그 변화를 원래 상태로 복구하는 방법은 없다.



문장은 또한 도피처가 된다. 현실의 규칙과 무게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문장 속으로 흘러든다. 활자 하나하나가 벽돌이 되어, 그 위에 쌓인 단어들이 낯선 도시를 세운다. 독자는 그 도시의 시민이 된다. 여권이나 통행증 없이 드나들 수 있는 세계, 다만 책장을 덮는 순간 사라져 버리는 세계. 그래서 어떤 독자는 결코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지 않는다. 사라짐의 순간을 미루기 위해.



어떤 문장은 애초에 이야기조차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한 장면, 하나의 감각, 혹은 단어 하나로만 존재한다. 그러나 그 파편이 남기는 울림은 서사보다 길게 지속된다. 바람이 불던 골목의 그림자, 창문 너머로 흘러나오던 오래된 음악, 아무 말 없이 마주 앉아 있던 얼굴. 이런 문장들은 결말보다 시작에 가까운 쪽에서 머문다. 그러나 그 머묾 속에서 독자는 스스로 끝을 상상한다.



문장은 방향을 속이기도 한다. 독자는 왼쪽으로 향한다고 믿지만, 문장은 이미 오른쪽으로 꺾여 있다. 그 꺾임이 느껴지는 순간, 독자는 읽기 전과 전혀 다른 곳에 서 있다. 당황과 낯섦이 겹쳐진 그 순간, 문장은 독자를 온전히 붙잡는다.


그렇기에 문장은 완전히 쓰이지 않는다. 마침표를 찍는 순간에도, 문장은 여전히 열린 상태다. 읽는 사람마다, 읽는 시기마다 다른 경로를 걷게 만든다. 같은 문장도 스무 살의 눈과 마흔 살의 눈에 비치는 풍경이 다르다. 나이를 먹을수록 문장 속 여백이 더 많이 보인다. 그 여백이야말로 문장이 데려가는 가장 먼 여행지다.



때로는 문장이 독자를 떠나, 전혀 다른 사람에게로 간다. 주고받은 편지 속 한 문장이 수십 년 후 다른 손에 쥐어진다. 그 문장을 읽는 이에게 원래의 맥락은 사라져 있지만, 새로운 감정이 거기에 덧입혀진다. 문장은 주인을 배신하고, 또 다른 주인을 받아들인다. 이렇게 문장은 세상 속에서 떠돌며 변형되고 재해석된다.



문장은 끝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종이에 인쇄되어도, 전자 화면에 빛으로 떠도, 그 본질은 잠시 빌린 육체에 불과하다. 문장은 읽는 이의 뇌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그 순간, 문장은 목적지를 잃는다. 목적지 없이 떠도는 문장은, 그 무목적성 속에서 더 멀리, 더 깊이 도달한다.



문장은 고백과도 닮았다. 발화하는 순간 이미 손을 떠나, 다른 해석과 감정의 소유가 된다. 말한 사람의 의도와 무관하게, 듣는 이의 기억 속에서 다른 이야기로 변형된다. 누군가에게는 상처로, 누군가에게는 구원으로 남는다. 문장도 그렇게 생존한다.



어떤 문장은 오래전 누군가의 눈빛과 닮아 있다. 차갑고 단정했으나, 그 안쪽에서 미세하게 떨리는 온도가 있었다. 그 온도를 읽어내는 순간, 독자는 문장과 거리를 잃는다. 그때부터 읽기는 일종의 침몰이 된다. 스스로 가라앉기를 선택하는 일.



그래서 문장은 단 한 번도, 자신이 당신을 어디로 데려갈지 알지 못한다. 그 무지 속에서 문장은 자유롭다. 그리고 그 자유가, 당신을 낯선 길 위에 세운다. 길의 끝은 비어 있고, 그 빈자리를 채우는 건 당신의 기억, 상상, 그리고 상실이다.



끝내 문장은 스스로의 도착지를 알지 못한다. 마치 역의 이름이 지워진 승강장에서, 한 대의 열차가 무표정하게 들어오는 것과 같다. 누군가는 그 열차에 오르고, 누군가는 서서 보내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 풍경을 창 너머로 바라본다. 어떤 목적지도 표시되지 않은 채, 열차는 떠난다. 그 뒤로 남는 건 금속이 레일 위를 미끄러질 때의 희미한 진동, 바퀴에서 흩날린 검은 먼지, 그리고 금방 사라져 버리는 바람뿐이다.



문장이 사라진 자리에도 여운이 남는다. 그것은 확실한 형태를 갖지 않는다. 읽었던 장면이 갑자기 흐릿해지고, 대신 다른 장면이 무언가의 틈으로 스며든다. 읽는 동안에는 분명히 있었던 대사나 표정이, 나중에는 기억에서 빠져 있다. 남는 건 오히려 부재의 감각이다. 누군가 방금 전까지 앉아 있던 의자에 남아 있는 체온처럼, 사라짐이 남긴 온도만이 오래 머문다.



그 온도는 서서히 식어간다. 식는 동안, 읽는 이는 자신이 방금 지나온 문장의 구조를 더듬는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골목, 색채가 불분명한 하늘, 기이하게 가벼운 발걸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던 공기의 농도. 그것들이 현실의 어느 순간과 겹치면서, 문장은 비로소 완전히 닫히지 않은 채로 남는다. 열어두기 위해 닫지 않는 문, 그 앞에 머무는 사람처럼.



그리고 그 상태는 오래 지속된다. 페이지를 덮은 이후에도, 읽은 문장이 가끔 불쑥 떠오른다. 물컵에 남은 물결처럼, 이유 없이 흔들리는 순간들이 있다.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날씨, 오래전에 들어본 음악, 우연히 마주친 풍경이 그 문장의 잔향을 다시 일으킨다. 그것은 전혀 긴박하지 않고, 조금도 화려하지 않다. 그저 느린 속도로, 그러나 확실하게 되살아난다.



문장은 그렇게 독자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그러나 그것은 원래의 형태가 아니다. 읽는 동안 들었던 목소리는 다른 목소리로 바뀌어 있고, 그때 본 표정은 새로운 얼굴로 교체되어 있다. 문장은 이미 독자의 것이 아니고, 쓰인 사람의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한 번만 존재했던 특정한 순간이자,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변형된 기억이다.

그래서 문장은 건조해진다. 애초부터 붙잡을 수 없었던 것을, 결국 끝까지 붙잡지 못한 채 놓아버린 건조함. 그러나 그 건조함 속에 작은 결이 남는다. 손끝으로 만져지지 않는 결, 그 위로 시간과 마음이 스친 흔적. 그 흔적이 사라지지 않는 한, 문장은 계속해서 떠돌 것이다.



아마도 문장은 그 떠돎 속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는다. 한때는 아주 가까이 있었으나, 지금은 거리를 둔 채 바라보는 사람처럼. 더 이상 손을 뻗지 않아도, 멀리서 가만히 존재를 느낄 수 있는 사람처럼. 문장은 그렇게 멀어지고, 동시에 남는다. 그리고 그 남음이.



모든 여정의 마지막 목적지다.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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