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눠갖는 계절.
가을은 계절의 전리품으로 오해받는다. 불타는 여름이 남긴 열기와 땀, 태양 아래에서 한껏 자라난 것들의 결과물이 낙엽으로 흩날리고 곡식으로 수확되는 순간, 사람들은 그것을 일종의 보상처럼 여긴다. 여름의 고통을 견뎠기에 비로소 주어지는 과실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가을은 여름의 뒤에 오는 보상이 아니다. 가을은 다른 시간의 법칙 속에서 이미 준비된 균열이며, 결코 여름이 남겨놓은 잔여물이 아니다.
걷다 보면 가장 먼저 변하는 것은 공기다. 여름의 공기는 무겁다. 몸에 닿는 순간 천천히 흡착되며, 옷감을 적시고, 피부의 모공을 벌리고, 어떤 날은 숨조차 가쁘게 만든다. 그러나 가을의 공기는 무게를 잃는다. 투명해지고, 얇아지며, 바람의 흐름이 공기 자체를 조각한다. 그 차이를 감각하는 순간, 계절은 단순한 순환이 아니라 성격의 분화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여름이 지나야 만 가을이 오는 것이 아니라, 가을은 이미 여름 한가운데서 공기 속에 잠복하고 있다.
이제 길가의 은행나무 잎은 초록을 버리지 못한 채 희미하질 것이다. 그 변화는 폭발이 아니라 균열이다. 바람이 세게 불어도 떨어지지 않던 잎들이 어느 순간, 별다른 사건 없이 툭 떨어져 내린다. 그것은 여름의 과잉이 소진된 결과라기보다는, 잎 자체가 이미 오래전부터 품고 있던 예정된 낙하다. 가을은 여름이 흘린 땀의 대가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어두운 혈관 속에서 자라온 그림자의 귀환이다.
수확의 계절이라는 표현은 오해의 산물이다. 곡식은 여름의 햇살만으로 자라지 않는다. 겨울의 냉기가 흙을 단단히 얼려 균열을 만들고, 봄의 빗줄기가 그것을 풀어낸 뒤, 여름의 열이 그것을 팽창시킨다. 그러나 가을의 거둠은 이 모든 과정을 하나로 묶어내는 마침표가 아니다. 오히려 문득 들이닥친 쉼표에 가깝다. 논두렁에 수북이 쌓인 볏단은 승리의 깃발이 아니라, 곧 닥쳐올 텅 빈 들판을 예고하는 허공의 표식이다.
사람들은 가을을 기억의 계절이라 부른다. 이유는 단순하다. 공기가 차가워지면, 감각은 본능적으로 자기 내부를 향한다. 여름이 바깥을 향한 계절이라면, 가을은 안쪽을 파고드는 계절이다. 땀으로 흘러나가던 체온이 서서히 안쪽에 머물면서, 사람들은 문득 오래된 목소리를 듣는다. 떠난 사람, 잊힌 얼굴, 말하지 못한 문장들이 허공에서 다시 떠오른다. 그러나 그것은 여름이 남겨놓은 부산물이 아니다. 오히려 여름의 소란이 잠시 사라진 자리에, 원래부터 존재하던 그림자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카페 창가에 앉아 있으면 유리 너머로 쏟아지는 햇살이 여름보다 훨씬 길게 비친다. 빛은 강하지 않다. 대신 길고 얇게 퍼져 바닥 위에 흘러간다. 그것은 마치 시간의 단면을 길게 늘여놓은 것처럼 보인다. 여름의 태양이 사람들의 등을 떠밀어 바깥으로 내몰았다면, 가을의 빛은 서서히 걸음을 멈추게 한다. 멈춘 자리에서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 그림자를 본다. 그 그림자는 여름 내내 따라다녔으나, 눈부신 태양 탓에 보지 못했던 것들이다. 가을은 시각의 계절이다. 빛이 약해질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존재한다.
가을이 여름의 전리품이라면, 모든 가을은 기쁨과 안도감으로 채워져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 가을은 종종 우울과 고독을 동반한다. 사람들은 가을을 타는 계절이라고 표현한다. 타는 것은 남겨진 열이 아니라, 꺼져가는 불씨다. 그 불씨가 마지막 빛을 발하는 순간, 사람들은 불현듯 자신이 한때 얼마나 뜨겁게 타올랐는지 떠올린다. 그러나 그것은 성취가 아니라 상실의 자각이다. 여름의 열기 속에서는 느낄 수 없던 결핍이, 가을의 차가움 속에서 비로소 뚜렷해진다.
낙엽은 연약하지만, 그 표면에는 여름의 그늘과 바람과 비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그러나 노인은 그것을 여름의 유산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손가락 사이에서 바스러져가는 잎의 가루는 지금-여기의 시간성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과거는 보존되지 않는다. 낙엽은 결코 여름의 전리품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가을의 소멸 그 자체다.
가을의 색은 단순한 화려함이 아니다. 붉음과 황금빛이 산과 들을 덮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여름의 보답이라 착각한다. 그 빛은 태양이 아니라 죽음의 전조다. 색은 절정이자 끝이다. 꽃이 피는 순간부터 시드는 시간까지를 동시에 품듯, 단풍잎의 빛은 이미 낙하를 예정하고 있다. 여름의 무르익음이 결실이라면, 가을의 빛은 소멸의 시각적 알림이다. 아름다움이란 종종 가장 깊은 소멸의 순간에만 드러난다.
시간을 분리하는 방식은 언제나 오해를 낳는다. 계절을 직선적으로 배열하면, 여름은 원인이고 가을은 결과가 된다. 그러나 실제의 계절은 직선이 아니라 동심원의 파문에 가깝다. 겨울의 한기에 갇힌 씨앗이 이미 가을의 소멸을 내장한 채로 존재한다. 모든 시작은 끝을, 모든 끝은 시작을 포함한다. 따라서 가을은 여름의 전리품이 아니라, 겨울의 예비음이며 봄의 지하수다.
밤이 길어질수록 창문에 비친 얼굴은 낯설다. 낮에는 햇살에 묻혀 사라졌던 주름과 그림자가 가을의 어둠 속에서 도드라진다. 사람들은 그 낯섦 속에서 문득 자기 생의 단면을 들여다본다. 그때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은 언제나 상실과 가까운 무언가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가을의 본질이다. 남겨진 것이 아니라, 사라져 가는 것의 또렷함.
한 권의 책을 덮는 순간과 닮았다. 여름은 책장을 열고 펼쳐 읽는 시간이고, 가을은 책을 덮고 난 뒤의 공허한 손바닥이다. 남은 것은 활자에 새겨진 의미가 아니라, 눈앞에 놓인 빈 책상이다. 그러나 그 빈자리에서만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가을은 도시의 건축물 위에서도 또렷하게 드러난다. 아스팔트의 열기가 빠져나가고, 밤의 콘크리트 벽은 낮보다 더 차갑게 빛난다. 여름의 도시가 땀으로 젖은 군중의 호흡이라면, 가을의 도시는 공허한 틈으로 채워진다. 건물 사이에 흘러드는 바람, 교차로에 멈춘 신호등의 빨간빛, 버스 정류장에서 긴 팔 소매를 잡아당기는 손동작이 계절의 진짜 얼굴을 보여준다. 그것은 소란이 꺼진 뒤에야 드러나는 세계의 구조다.
시장은 다르다. 여름에는 생기가 넘치던 과일 가게의 상자가 빠르게 줄어든다. 포도와 감, 대추가 그 자리를 메우지만, 그것은 확장이라기보다는 수축에 가깝다. 상인은 손님에게 맛보라며 작은 접시에 담긴 과육을 내밀지만, 단맛 뒤에는 이미 곧 사라질 것이라는 쓸쓸한 예감이 깔려 있다. 가을의 시장은 물건을 파는 공간이라기보다, 소멸의 낱장을 건네는 장면 같다.
시골 마을의 저녁은 더 선명하다. 논두렁에서 모여드는 귀뚜라미 소리는 처음에는 충만하게 들리지만, 곧 누락된 음처럼 느껴진다. 그 소리는 여름의 전리품이 아니다. 오히려 한 계절이 저물어가며 남긴 울림, 사라지는 소리의 윤곽이다. 귀뚜라미 울음 속에서 사람들은 계절의 정직한 퇴장을 듣는다.
가을은 흔히 낭만의 계절로 포장되지만, 사실 그 낭만조차 소멸의 그림자를 전제로 한다. 가을의 시는 사랑을 노래하기보다 이별을 예비한다. 가을의 음악은 환희보다는 잔향을 강조한다. 낭만이란 화려한 수식이 아니라, 곧 사라질 것의 마지막 빛남이다. 그러므로 가을의 낭만은 본질적으로 비극과 닮아 있다.
젊음이 여름이라면, 가을은 그 젊음을 지나온 이들에게 찾아오는 시간이다. 그러나 그것은 젊음의 전리품이 아니다. 생의 중반부에서 느껴지는 깊은 성찰이나 차분함은 젊음이 남겨놓은 부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삶 자체가 본래부터 품고 있던 구조적 굴곡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여름이 불러낸 것이 아니라, 시간이 고유하게 새겨놓은 층위다.
그래서 가을을 오해하는 순간, 삶 역시 오해된다. 여름이 지나야 만 성숙이 오는 것이 아니라, 성숙은 언제나 삶 속에 잠복해 있다. 다만 뜨겁고 눈부신 시절에는 보이지 않을 뿐이다. 가을이 도래할 때 그것이 드러나는 것처럼, 삶의 어떤 순간에도 이미 다른 계절이 겹겹이 숨어 있다.
가을은 여름의 전리품이 아니다. 그것은 계절의 독립된 세계이자, 소멸 속에서만 드러나는 빛이다. 여름을 견뎌냈다고 해서 반드시 얻을 수 있는 선물이 아니라, 오직 가을이라는 시간대에만 열리는 문이다. 전리품이 아니라, 홀로 도착하는 세계. 모든 시작과 끝이 교차하는 경계.
그저 가을로 존재한다.
사진 출처>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