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보다 달콤한 계절의 기억.
가을은 협상하지 않는다. 시간의 질서를 무너뜨리지도 않고, 과장된 폭력으로 위협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어느 순간, 눈을 들면 이미 잡혀 있다. 공기는 이전 계절과 다르지 않게 숨을 허락하면서도, 그 숨을 길게 끌어내지 못하게 한다. 잎사귀는 바람의 장단에 맞춰 떨어져 내리고, 길가의 벤치에는 빛의 각도만으로도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다. 누구도 직접적으로 묶이지 않았지만, 발목에는 보이지 않는 밧줄이 걸려 있다. 가을은 그 사실을 끝내 부인할 수 없게 만든다.
인질극은 보통 긴박한 순간으로 설명된다. 총구의 그림자, 유리창 너머의 긴장된 협상가, 바닥에 엎드린 몸짓. 그러나 가을의 인질극은 정적과 아름다움으로 이루어진다. 푸른 하늘과 황금빛 들판은 탈출의 가능성을 망각하게 만들고, 스스로 붙잡히는 쪽을 택하게 한다. 이는 전형적인 스톡홀름 증후군의 구조다. 피해자는 납치자의 얼굴을 증오하기보다, 그 얼굴에 담긴 결핍과 고독을 이해하고 연민을 느낀다. 가을 역시 그렇다. 낮게 깔린 빛은 연약하고, 서늘한 바람은 외롭다. 그 외로움이 강제력을 대신한다. 결국 인질은 자유를 원하지 않고, 포획된 상태를 운명처럼 수용한다.
거리의 사람들 얼굴에도 가을의 낯빛이 스며든다. 여름 내내 타오르던 혈색은 옅어지고, 피부에는 서늘한 빛이 얹힌다. 카페 창가에서 책장을 넘기는 손끝은 종이의 결보다 더 얇게 보이고, 한 모금의 커피가 목을 타고 내려가는 길목에서 시간은 잠시 멈춘다. 이 멈춤이 바로 구속이다. 시계는 계속 돌아가는데, 가을은 그 회전의 의미를 무력화시킨다. 시각은 흘러도 감각은 붙잡혀 있다.
스톡홀름 증후군의 본질은 생존 본능이 납치자와의 동일화로 전환되는 과정이다. 그것은 모순이자 착각이지만, 동시에 인간이 가진 가장 원초적인 적응 방식이다. 가을은 이 적응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발적인 동조를 유도한다. 붉게 물든 나무 아래 서 있을 때, 그 불타는 색채를 거부하기는 어렵다. 불안과 고독이 함께 몰려오면서도, 그 불안을 사랑하게 되고, 그 고독에 매달리게 된다. 마치 차갑게 식은 손을 스스로 움켜쥐듯.
도시의 골목에는 낯선 정적이 자리한다. 여름의 소음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고, 남겨진 것은 낮게 울리는 발자국 소리뿐이다. 저녁 무렵, 누군가는 창문을 닫으며 방 안을 따뜻하게 덮어주지만, 동시에 공기를 나누어주는 바람과 단절된다. 그 순간 폐 깊숙이 스며드는 가을의 냄새가 그립다. 불가피하게 갇히고 싶어진다. 누가 인질을 자처하는가. 바로 그리움이 그렇다. 가을은 그리움으로만 사람을 속박한다.
잎이 떨어지는 장면은 흔히 소멸로 해석되지만, 오히려 그것은 지연된 고백에 가깝다. 나무는 이미 비워내는 법을 알고 있었고, 바람은 오래전부터 그것을 재촉하고 있었다. 사람은 그 광경을 보며 불안에 휩싸인다. 언젠가 반드시 다가올 끝을 예행연습처럼 지켜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끝은 공포가 아니라 아름다움으로 포장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함정이다. 공포는 탈출을 부른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남아 있게 만든다. 인질은 끝내 납치자의 손길을 뿌리치지 못한다.
길 위에 흩어진 낙엽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의 편지처럼 보인다. 이미 쓰여진 내용은 사라졌지만, 종이의 질감은 여전히 남아 있다. 바람이 그것을 실어 나를 때마다, 마치 누군가의 고백이 공기 중에 흩뿌려지는 것 같다. 인질로 잡혀 있는 동안, 사람은 스스로의 감정을 다시 읽게 된다. 읽히지 않던 문장이 갑자기 눈에 들어오고, 오랫동안 무시했던 단어가 무게를 갖는다. 그 무게는 탈출을 방해한다. 결국 머물러야 한다는 감각이 생긴다.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진 인질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를 잃는다. 사랑과 속박의 구분도 모호해진다. 가을이 가진 힘은 바로 이 모호함이다. 차갑지만 따뜻하고, 끝이지만 시작 같으며, 쓸쓸하면서도 풍요롭다. 이 모순의 조합은 결코 단순히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설명 불가능한 지점에서 사람을 사로잡는다. 언어는 가을을 다 표현하지 못하지만, 표현의 한계 자체가 인질극의 증거가 된다.
밤이 깊어질수록 가을의 권력은 강해진다. 창밖의 바람은 느슨하게 커튼을 흔들고, 책상 위의 전등은 지나치게 밝아진다. 그 빛 아래에서 읽히는 글자들은 사소한 단어조차 날카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이는 포획의 순간이다. 의미 없는 것이 의미를 띠고, 버려진 것이 그리움으로 전환된다. 가을은 무가치한 것들을 가득 차오르는 가치로 둔갑시킨다. 인질은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벗어나지 못함을 즐기게 된다.
탈출은 사실 가능하다. 비행기를 타고 다른 계절로 가면 된다. 혹은 인위적으로 여름의 습도를 만들어내는 방안에 숨어들 수도 있다. 그러나 탈출을 택하는 순간, 더 깊은 결핍이 남는다. 마치 사랑하는 대상을 일부러 잊으려 할수록 더 선명해지는 기억처럼. 가을로부터의 도피는 실패를 전제로 한다. 인질은 알고 있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도라면 차라리 붙잡혀 있는 편이 덜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스톡홀름 증후군은 단순한 심리적 왜곡이 아니라, 인간이 삶을 견디는 방식의 은유다. 견딜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견딜 이유를 만들어내는 능력. 가을의 인질극은 이 은유를 가장 명확하게 드러낸다. 차가워지는 공기 속에서 몸을 움츠리며, 동시에 그 공기를 갈망하는 감각. 붉은 낙엽의 소멸을 보며 슬퍼하면서도, 그 소멸이 주는 황홀에 취하는 마음. 결국 인질은 자유를 두려워하게 된다. 자유란 아무것에도 잡히지 않는 상태지만, 아무것에도 붙잡히지 않는다는 것은 동시에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는 말과 같다. 가을은 이 허무의 공백을 채워준다. 붙잡힘으로써만 의미가 발생한다.
가을에게 인질로 잡혀 있는 시간은 단순한 계절의 통과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체험이고, 삶이 왜 끝내 사라져야만 빛날 수 있는가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가을은 협상하지 않는다. 그러나 협상이 필요 없는 이유는 이미 인질이 스스로 동의했기 때문이다. 사랑처럼, 그 속박은 달콤하고 치명적이다. 인질은 가을의 손아귀에서 풀려나고 싶지 않다. 오히려 조금 더 오래 붙잡혀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비극인지 행복인지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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