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감정이 삶을 잠식할 때
감정이 하나의 기관처럼 옮겨질 수 있다고 상상해 보자. 심장을 갈아 끼우듯, 간이나 신장을 옮겨 받듯, 타인의 감정을 적출해 보존하고, 다른 사람의 내면에 심는 일. 문학과 예술이 오래전부터 은밀히 수행해 온 실험이 바로 그것이었다. 한 권의 책을 읽고 난 뒤 찾아온 낯선 슬픔, 한 곡의 음악을 듣고 난 뒤 남은 설명할 수 없는 기쁨, 혹은 한 사람의 표정을 목격한 뒤 흘러들어온 미묘한 불안. 그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 돼온 감정의 이식이었다.
의학적으로 말하자면, 감정은 가장 불안정한 장기다. 심장은 규칙적으로 뛴다. 간은 독을 해독하고, 신장은 노폐물을 걸러낸다. 감정은 다르다. 리듬을 허락하지 않고, 독을 해독하지 않으며, 쓸모없는 잔여물조차 내보내지 못한다. 그대로 쌓이고 굳어, 체내의 어느 어두운 구석에서 돌처럼 퇴적된다. 그래서 이식될 때, 그것은 어떤 장기보다 불안정하고 위험하다.
쇼팽의 녹턴을 듣고 난 뒤 찾아오는 설명할 수 없는 우울은, 사실상 기증자의 기억이 이식된 순간과 다르지 않다. 그 선율은 오래전에 작곡가가 홀로 겪은 상실의 음영으로부터 흘러나왔다. 그는 어떤 사랑을 잃었고, 어떤 밤을 견뎌냈으며, 어떤 불안을 피아노 건반 위에 남겼다. 세월이 지난 뒤에도 그 감정은 악보 속에 봉인되어 있다가, 청자의 내면으로 이식된다. 음악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기억의 조직과 같다. 건반이 울릴 때, 듣는 이는 자기 삶과 무관한 상실의 무게를 잠시나마 자기 것으로 견딘다.
카프카의 문장은 또 다른 방식으로 침투한다. 그의 문장 속에는 고독한 사무실, 불안한 절차, 끊임없이 밀려드는 죄의식이 응축돼 있다. 독자는 활자를 따라 내려가다가, 어느 순간 자기 삶의 장면이 낯설게 겹쳐 보이는 경험을 한다. 읽는 이는 원래 겪지 않았던 불안을 기증받는다. 책장을 덮은 뒤에도, 관공서의 긴 복도나 상사의 무심한 시선 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긴장이 솟아오른다. 그것은 독자의 감정이 아니라 카프카가 남겨둔 불안의 잔여물이다. 문학은 이처럼 은밀한 이식술을 오랫동안 수행해 왔다. 인간은 책과 음악, 그리고 예술의 언어를 통해 타인의 내면을 몸속으로 옮겨 받는다. 이식은 언제나 자발적이고, 또 동시에 돌이킬 수 없다.
스며드는 순간
첫 번째 징후는 꿈속에서 나타난다. 가본 적 없는 도시의 풍경이 낯설지 않게 다가올 때, 이미 감정의 뿌리가 내린 것이다. 좁은 골목, 푸른 가로등, 낮게 깔린 먼지 냄새. 존재하지 않는 장소인데도, 꿈에서는 이미 수십 번 걸어본 길처럼 익숙하다. 그 길을 걸을 때마다, 기증자가 평생 안고 살았던 고독이 낯선 가슴을 두드린다.
다음은 향기다. 흰 라일락. 실제로는 맡아본 적도 없는 향인데, 갑자기 코끝을 파고든다. 라일락 향이 감도는 공간에서 숨이 막히고, 설명할 수 없는 우울이 쏟아진다. 그것은 자신의 감정이 아니다. 타인의 기억이 남긴 침투의 흔적일 뿐이다.
습관도 바뀐다. 펜을 잡을 때 오른손 검지가 이상한 각도로 꺾인다. 평생 해본 적 없는 자세. 그것은 기증자가 글을 쓰던 방식이었다. 낯선 불편함 속에서 묘한 친밀감이 뒤섞인다. 손끝의 근육이 타인의 기억을 복원하며, 감정의 통로가 된다.
심지어 사물의 촉감까지 변한다. 문 손잡이의 금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서늘함이 올라온다. 평생 아무렇지 않게 잡던 문 앞에서 잠시 멈칫한다. 기증자가 두려움에 떨며 쥐었던 동일한 감각이, 지금 다른 삶의 손바닥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일상의 미세한 부작용
부작용은 사소하게 시작된다.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오래된 발라드 후렴구가 견딜 수 없을 만큼 거슬린다. 이유 없는 분노가 치민다. 그 노래는 기증자의 치욕적인 이별과 결부돼 있었기 때문이다.
또는 파란색이 눈을 찌른다. 파란 컵, 파란 셔츠, 파란 교통표지판. 그 색만 보면 눈가가 젖는다. 기증자의 기억 속에서 파란색은 연인과의 마지막 장면을 봉인한 색이었다. 직접 겪지 않은 상실인데도, 수용자의 눈물은 진실하다.
말버릇이 변한다. 평생 쓰지 않던 어투가 무심코 흘러나온다. 웃는 표정이 달라진다. 사진 속 얼굴은 자기 얼굴이지만, 웃음은 다른 사람의 것이다. 기증자가 평생 지녔던 표정이 무의식적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행동의 변이도 나타난다. 숟가락을 드는 방식, 다리를 꼬는 자세, 글자를 쓰다 튀어나오는 낯선 필체. 몸이 자기 것 같지 않은 순간마다 공포는 커진다.
그리고 사회적 부작용이 찾아온다. 대화 중 낯선 말투가 튀어나와 상대가 고개를 갸웃한다. “왜 그렇게 말해?”라는 질문 앞에서 스스로조차 설명할 수 없다. 작은 균열이 인간관계 속에서 번진다. 억양 하나, 웃음 하나가 이미 자기 것이 아니게 된 순간, 타인들은 알 수 없는 거리를 감지한다.
지연된 반응
거부 반응은 언제나 늦게 온다. 몇 달, 몇 년간 아무렇지 않게 살다가, 작은 자극에서 균열이 일어난다. 커피 잔의 온도에서 갑자기 극심한 불안이 솟구친다. 해결해야 할 문제를 기다리는 사람들 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공포가 몰려온다. 그것은 기증자가 경험했던 공포의 잔여다. 수용자의 신경계는 그것을 자기 것처럼 받아들이고, 몸은 굳는다. 이상반응은 없다던 말이 허위였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지연된 반응은 삶을 바꾼다. 낯선 장소에서 눈물이 터지고, 이해할 수 없는 분노로 관계가 무너진다. 이유 없는 기쁨이 하루를 바꿔놓는다. 이식된 감정은 침묵 속에서 삶을 개조한다. 결국 지금 살고 있는 삶은 순수하게 자기 것이 아니다. 타인의 기억과 감정이 얽혀 만들어진 혼종의 삶이다.
눈물, 웃음, 분노, 기쁨. 무엇이 자기 것이고, 무엇이 이식된 것인지 더 이상 구분할 수 없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혼란이야말로 인간을 더 인간답게 만든다.
남겨진 문장
감정의 이식은 멈출 수 없다. 인간이 살아 있는 한, 눈빛 하나, 단어 하나, 손끝의 떨림 하나가 무방비하게 스며든다. 이식된 감정은 흔적을 남기고, 흔적은 삶을 재구성한다. 정체성이라 불리는 것은 결국 기증받은 감정들의 총합이다.
의사들은 말한다. “아직 이상반응은 없습니다만.” 이 말은 언제든 이상반응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경고다. 감정은 결코 안착하지 않는다. 늘 흔들리고, 흔들리며 또 다른 감정을 이식한다. 살아간다는 것은 무수한 감정 이식을 견디는 과정이다. 사랑도, 상실도, 욕망도 그 과정에서 비롯된다. 이상반응은 늦게 찾아오더라도 반드시 찾아온다. 그리고 바로 그 지연된 반응은 인간을 끝내 인간으로 만드는 것 아닐까.
이상반응은 곧 실패의 징후로 읽히지만, 실은 그것이야말로 감정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온전히 자기 것이라 믿었던 감정이 낯선 파문에 흔들릴 때, 인간은 비로소 타자와 섞여 있음을 자각한다. 안정은 무균실의 평온일 뿐이고, 불안과 동요 속에서만 정체성은 갱신된다. 거부와 혼란, 설명할 수 없는 눈물과 분노야말로 감정 이식의 진짜 성과다. 완벽히 자기 자신일 수 없다는 불완전성이야말로.
인간다움의 가장 아이러니한 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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