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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의 탄환.

감정이 식은 자리 여전히 차가운 방아쇠

by 적적

두 가지의 선택지가 남는다. 다리는 이미 감각이 없고 방아쇠를 당길 힘이 남겨졌다는 사실.

하나는 턱아래로 총구를 가져다 대는 일, 다른 하나는 총구를 밖으로 향해 밀려드는 감정에 맞서는 일.

후자를 택하는 이유는.



감정은 언제나 앞서간다. 행군의 맨 앞줄에서 깃발처럼 펄럭이며 방향을 제시하다가, 어느 순간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사라진다. 뒤처진 자에게는 무겁고 날 선 도구만 남긴 채로. 남겨진 총과 실탄은 정밀하게 다듬어진 도구라기보다, 불안한 고철 덩어리에 가깝다. 그것을 쥐고 있는 손은 떨리고,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은 언제나 오판에 가깝다. 감정은 낙오병을 믿지 않는다. 대신 떠난다. 그 부재야말로 낙오의 징표다.


도시는 어둡게 빛난다. 밤의 네온사인은 화려하지만, 그 빛을 머금는 눈은 건조하다. 한때 불타오르던 열망이나 사랑, 분노 같은 감정들은 먼지가 되어 벽에 붙어 있다. 낙오병은 도시의 소음 속에서 총을 만지작거린다. 그것은 타인의 죽음을 겨냥하기보다, 남겨진 자신을 확인하는 방식에 가깝다. 감정이 떠난 자리는 폐허다. 폐허에서는 기계적 규율만 남는다. 숨 쉬고, 걷고, 말하고, 대답하는 몸짓. 그 모든 것이 자동 장전된 탄창처럼 삐걱거리며 돌아간다.



총은 실재하지만 감정은 환영이다. 환영이 사라지면 실재만 남는다. 실재는 언제나 무겁고 차갑다. 그것을 버릴 수도, 무시할 수도 없다. 총과 실탄은 비유라기보다 물질이다. 감정이 사라진 후에도 총은 계속 무게를 가진다. 손바닥에 눌리고, 허리에 매달리고, 방 안의 책상 위에서 침묵한다. 감정은 떠나며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하지만, 무기의 존재는 그 사실을 역설한다. 감정이 떠났다는 사실이 총의 무게로 증명된다.



사랑이 떠난 자리에는 편지가 남는다. 편지에는 아무도 읽지 않는 문장이 적혀 있다. 문장은 총알이다. 단단하고 날카롭지만, 발사되지 못하면 의미를 잃는다. 그러나 그것을 쥐고 있는 자에게는 언제든 발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고통이 된다. 낙오병은 총알을 바라본다. 그것이 자신을 구할 것인지, 아니면 완전히 끝낼 것인지 알 수 없다. 감정은 대답하지 않는다. 이미 떠났으므로.



전쟁에서 낙오병은 가장 먼저 잊힌다. 기록되지 않고, 보고되지 않는다. 지도에는 표시조차 남지 않는다. 격렬하게 달아오르던 순간이 지나면, 가장 먼저 방치되는 건 개인의 작은 균열이다. 그 균열은 이름을 가지지 못한 채, 삶의 맨 가장자리에서 썩어간다. 총과 실탄은 그런 균열의 물리적 상징이다. 손에 쥔 것 같지만, 사실은 손을 지배한다. 무기가 주인이 되고, 낙오병은 도구가 된다.


감정이란 종종 배신의 형태로 나타난다. 오랜 시간 함께할 것 같던 감정이 돌연 사라지는 순간, 남겨진 자는 두 가지 질문에 사로잡힌다. 왜 떠났는가, 그리고 왜 자신을 남겼는가. 총과 실탄은 그 질문의 답처럼 놓여 있다. 그러나 정작 답을 말해주지 않는다. 대신 가능성을 제공한다. 쏠 것인지, 쏘지 않을 것인지. 감정의 부재는 선택의 무게로 전환된다. 낙오병은 그 무게를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다.



거리의 벽에는 오래된 포스터가 찢겨 붙어 있다. 빛이 바래고 종이가 벗겨진 자리에 남는 건 흔적뿐이다. 감정 역시 흔적으로 남는다. 그러나 그것은 다정하지 않다. 흔적은 지워지지 않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 오직 응시할 뿐이다. 낙오병이 손에 쥔 총도 그렇다. 어떤 방향으로 쏠 것인지, 언제 쏠 것인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존재한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위협이고, 또 위안이다.


감정이 사라진 뒤 남은 총은 권태다.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지루함. 그러나 동시에 당기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파국. 낙오병은 이 두 극단 사이에서 흔들린다. 감정이 있었을 때는 총이 문제 되지 않았다. 감정은 총보다 앞서 있었고, 총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감정이 떠나고 나면 총은 우두머리가 된다. 남은 자의 세계를 지배하는 유일한 중심.



감정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언제나 기계적 반복이다. 시계의 초침, 전화벨의 울림, 화면 속 스크롤. 그것들은 총알이 발사되지 못하도록 막는 안전장치처럼 작동한다. 그러나 안전장치는 언젠가 해제된다. 낙오병은 반복에 잠식당하다가도 문득 총의 무게를 느낀다. 그것은 여전히 거기 있다. 감정이 없는 자리에서 무게만 남아있다. 그 무게는 견딜 수도, 버릴 수도 없다.



감정이 떠났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다만 총을 들고 있다는 사실로 대체할 뿐이다. 감정이 없는 자는 낙오병이다. 낙오병은 도로의 끝, 행군의 끝, 대화의 끝에서 방황한다. 그 방황 속에서 총은 손에 쥔 작은 증거물이다. 감정은 이미 사라졌지만, 총이 존재하는 한 감정의 흔적은 부인할 수 없다.



감정은 남겨진 자를 연민하지 않는다. 차갑게 등을 돌리고 사라진다. 연민은 감정이 아니다. 연민은 감정이 남긴 그림자다. 그림자는 따라오지만, 결코 빛이 되지 못한다. 낙오병은 그림자와 함께 걷는다. 총은 그 그림자를 겨누는 방식으로만 쓰일 수 있다. 그림자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면, 총알은 그림자를 뚫지 못한다. 그러나 그 순간 낙오병은 자신을 겨눈다. 그림자는 언제나 자신에게 붙어 있으므로.



감정은 살아 있는 자의 무기다. 떠난 뒤에는 죽은 자의 무기가 된다. 죽은 자의 무기는 살아 있는 자를 유혹한다. 낙오병이란 결국, 죽은 감정의 무기를 떠안은 자다. 그는 언젠가 그것을 쏠 것이다. 자신을 향하거나, 혹은 세계를 향하거나. 그러나 그 선택의 순간조차 감정은 관여하지 않는다. 이미 떠났으므로. 감정의 부재가 모든 결정의 근본 배경이 된다.



총과 실탄은 무언가를 끝내기 위한 상징이 아니라, 끝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도구다. 감정이 떠났음에도 삶은 지속된다. 총은 그 지속을 증명한다. 낙오병은 매 순간 총의 무게를 느끼며,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자각한다. 그것은 고통이자 역설적 희망이다. 감정이 사라진 자리에서조차, 끝내 버려지지 않은 무언가가 남아 있다는 사실. 총은 그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언젠가 총은 녹슬고, 실탄은 무용해질 것이다. 감정이 떠난 자리는 결국 무기마저도 무화시킨다. 낙오병은 시간이 흐른 뒤 빈손을 들게 될 것이다. 빈손은 무기보다 가볍고, 동시에 더 무섭다. 무기를 내려놓은 손은 어디에도 쓸 수 없다. 감정이 없는 손은 포옹하지 못하고, 작별도 건네지 못한다. 오직 공허하게 떨릴 뿐이다.



감정은 낙오병에게 총과 실탄을 남기고 떠난다. 그러나 그것은 저주이자 유산이다. 저주는 끝을 재촉하지만, 유산은 살아남게 한다. 총은 방아쇠를 당기라는 명령이 아니라, 감정이 떠났음을 잊지 말라는 표식이다. 낙오병은 그 표식을 들고 계속 걷는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걷는다. 감정은 사라졌으나, 무게는 남는다. 무게는 곧 존재의 증거다.


감정은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 돌아온다고 믿는 건 환영일 뿐이다. 그러나 총과 실탄이 남아 있는 한, 감정의 흔적은 세계를 지배한다. 낙오병은 그 흔적을 끌어안고 살아간다. 그것이 감정이 남긴 마지막 방식이다. 사랑이든 분노든, 기쁨이든 슬픔이든, 감정은 끝내 떠나지만, 무기를 남김으로써 낙오병을 세계에 묶어둔다. 총은 부재의 증명서다. 감정은 그것을 서명도 없이 남긴다.



그리하여 결국 감정은 떠났으나, 낙오병은 여전히 걷는다. 총과 실탄은 무겁게 손에 남아 있다. 그 무게가 낙오병의 세계를 지탱한다. 감정의 부재 속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그것은 마치 낙오병이 끝내 총을 쏘지 않고, 어딘가로 향해 걷는 것과 같다. 감정이 떠난 자리에 남은 무기는.



삶을 이어가게 하는 마지막 힘이다.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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